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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 업] 부디 그리기를 멈추지 마시라

PISAF 찾은 디즈니의 수작업 애니메이터 에릭 골드버그

알록달록 하와이안 셔츠, 백발에 흰 수염이 영락없는 동네 할아버지다. 세계적인 캐릭터 전문가이자 디즈니에서 몇 남지 않은 수작업 애니메이터인 에릭 골드버그의 첫인상은 푸근하고 친숙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몇 마디 말이 오가기도 전에 거장이 거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절감한다. <알라딘>에서 램프의 요정 ‘지니’를 창조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1995)의 감독을 역임한 그는 얼마 전 <공주와 개구리>(2009)에서 유색인종 공주인 ‘티아나’ 캐릭터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가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PISAF) 2012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천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환상의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디즈니의 살아 있는 역사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방금 마스터클래스 강의를 마치고 나왔는데, 바로 인터뷰에 응해줘서 감사하다. =천만에. 이야기하는 걸 워낙 좋아한다. 다만 남들도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즐거운지는 알 수 없지만. (웃음)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방금 마스터클래스에선 알맞은 순간에 웃음이 터져주어 다행스러웠다. (웃음)

-포카혼타스나 <공주와 개구리>의 티아나처럼 디즈니에서도 색다른 여성 캐릭터를 주로 창조했다. =개성 강한 캐릭터를 좋아한다. 심각한 역할이든 웃긴 인물이든 중요한 것은 캐릭터 자체의 강한 개별성이다. 그저 튀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강한 인상만큼 중요한 것은 관객의 공감 여부다. 관객이 캐릭터를 응원할 수 있도록 캐릭터 스스로 이야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포카혼타스>의 경우 인디언이라는 것도 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다시 한 번, 중요한 것은 공감이다. <포카혼타스>를 만들기 위해 방대한 자료조사가 필요했다. 버지니아주 현지답사도 했고 여러 사학자의 조언도 들었다. 그 결과 그녀에게 대립하는 개척자들과 인디언 사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드라마가 있다고 판단했다. 좋은 작품은 얼마나 이를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인상 깊은 캐릭터들을 창조했다. 램프의 요정 ‘지니’의 액션은 한동안 거의 모든 애니메이션에서 유행처럼 번졌고, <공주와 개구리>의 ‘티아나’도 파격적이었다. =액션이 항상 과장되면 빨리 지친다. ‘지니’의 경우 사람들이 램프의 요정의 감정을 움직임을 통해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일정한 리듬과 완급은 필수다. 빠르고 현란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사람들이 캐릭터의 감정을 읽을 수 있도록 여유를 줘야 한다. 과장된 액션일수록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묘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트럼펫 부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트럼펫 연주자의 실제 연주를 따라 그렸다.

-하나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연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굳이 말하면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웃음)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게 본심이다. 테크닉은 부차적인 것이다. 최상의 결과는 캐릭터가 하는 행동이 캐릭터 내부 감정에 우러나와야 하고 그것이 전달되는 것이다. 그림을 따라 눈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환타지아 2000> 중 <랩소디 인 블루>와 <요요를 하는 홍학>은 부인인 수잔 매킨지 골드버그와 작업을 함께했다.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웃음) 수잔은 내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색채 감각이 있다. 서로의 예술적 감각을 이해하고 작품의 원동력이 되는 격려를 주고받는 건 쉽게 할 수 없을 감동적인 경험이다. 성공적인 공동작업의 비결은 언제나 칭찬이다. (웃음)

-최근 디즈니 작품 중엔 2D애니메이션을 찾아보기 힘들어 아쉽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2D와 3D를 구분하고 대립각을 세우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테크닉은 다양함의 척도이지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 거니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2D의 질감을 선호한다. 수작업에는 온기가 묻어 있다.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실수와 느슨함에서 비롯되는 친근함이다. 최근엔 수작업과 CG의 장점을 결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아직은 극비다. 회사 방침상. (웃음)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한말씀 부탁한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여 본 학생들의 애니메이션은 모두 환상적이었다. 창의적인 건 물론이고 기술의 정교함도 굉장했다. 특별한 조언이 필요없을 것 같다. 계속 지금처럼만 하길 바란다. 노파심에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디 그리기를 멈추지 마시라.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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