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심란하고 머리가 복잡한 날엔 <셜록 홈스>를 읽거나 김수현의 드라마를 본다. 무엇 하나 닮은 구석 없어 보이는 둘 사이의 공통점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용의자가 피운 담배의 종류부터 가족의 저녁식사에 들어갈 마늘의 양까지 작가가 하나하나 질서정연하게 다듬어낸 세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 보면, 주인공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에 몸을 싣고 있건 언성을 높여 싸우다 멱살잡이를 하건 어느덧 내 마음은 안식을 찾고 평온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관성 없는 캐릭터와 개연성 없는 사건들이 우격다짐하듯 끌어가는 드라마들에 지쳐 있을수록 김수현의 새 작품을 기다리게 된다. 아무래도 <셜록 홈스>는 더이상 신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JTBC <무자식 상팔자>는 이렇듯 김수현표 가족드라마를 사랑하는 내게 오랜만의 단비 같은 드라마다. 90년대 <목욕탕집 남자들> 시절부터 여전한 ‘3대가 한집에 살고 형제간이 지척에 모여 사사건건 서로 간섭하고 참견하는 와중에 쌓여가는 미운 정, 고운 정’의 구도가 근 이십년째 지속되고 있는 데 대해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도 종종 있지만 어떤 면에서 이는 그리 비현실적인 설정이 아니다. 대가족이 마당있는 주택에 모여 살지 않는다뿐이지 부모 중 한쪽, 특히 아버지가 장남이라면 좁디좁은 아파트에서 3대가 복닥거리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내 세대에도 드물지 않다. 게다가 가까이 살지는 않더라도 수시로 전화해 성적은 잘 나오느냐, 취직은 했느냐, 시집은 안 가느냐 묻는 눈치없는 친척이나 크고 작은 사고를 쳐놓고 뒷수습을 부탁하는 삼촌과 사촌의 존재도 집안마다 한둘쯤은 꼭 있는 법이니.
이 변치 않는 틀 안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KBS <부모님 전상서>), 엄마의 ‘의무’를 내려놓고 안식년을 요구하는 여성(KBS <엄마가 뿔났다>), 동성애자 아들(SBS <인생은 아름다워>) 등을 등장시킴으로써 가족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집단을 향해 매번 새로운 숙제를 부과해온 김수현 작가가 <무자식 상팔자>에서 꺼내든 카드는 미혼모라는 소재다. 팔순에도 가장으로서의 짱짱한 위엄을 과시하는 안호식(이순재)의 손녀, 공부 잘하는 판사 딸을 평생의 자랑으로 알고 산 안희재(유동근)의 장녀 소영(엄지원)이 부잣집으로 장가들어 떠나버린 전 애인 인철(이상우)의 아이를 몰래 낳기로 하면서 사달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삭의 소영과 공중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막내 숙모 새롬(견미리)이 남편 희규(윤다훈)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희재와 아내 지애(김해숙)를 거쳐 둘째 숙부 희명(송승환)과 소영의 동생들에게까지 알려지는 것도 불과 며칠 상간이다. 하지만 야무지고 강단있기가 참기름 발라놓은 마늘쪽 같은 김수현의 여주인공들이 그렇듯, 만삭의 소영은 노발대발하는 엄마 앞에서 한마디도 지지 않고 “선진국에서는 미혼모에 대한 편견 같은 것 없다”며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시청자와의 ‘편견’과 기꺼이 맞서 싸울 것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무자식 상팔자>는 신파와 출생의 비밀과 기업 후계 구도를 빼고도, 심지어 소영의 임신처럼 굵직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가족간의 갈등이 얼마나 다양하고 현실적인 고민과 맞닿을 수 있는가를 새삼스레 보여주는 작품이다. 입만 열면 물 아껴쓰라고, 쌀 아껴쓰라고, “우리 땐 얼마나 먹고살기 힘들었는지”에 대해 아침저녁 했던 잔소리를 또 하느라 아내 금실(서우림)을 노이로제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 호식 캐릭터는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서 흔히 마주치는 자수성가형 ‘꼰대’ 어르신의 전형에 가깝다. 정년퇴직 뒤 가정 내 입지가 약해지는 데 대한 위기감에 시달리다 비뚤어져버리는 희명의 유치함 등 나이 들면서 더욱 아이 같아지는 중•장년층 남성에 대한 묘사 또한 명절 친척 모임을 보는 듯 디테일하다. 그래서 요즘은 ‘김수현 월드’에 넋을 놓고 있다가도 퍼뜩 생각한다. 김수현 이후 어떠한 세대와 계층의 일상성을 이토록 탁월하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게 참 아쉽다.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