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뼛속까지 시인이겠지만, 김선우는 산문의 혁명적 힘을 믿는다. 글로 만났을 때만큼이나 발화되는 그녀의 언어는 명료하지만, 마치 책을 암송하듯 비문이 없는 문장 사이로 한숨이 섞일 때 웃음이 새어들 때 말은 말 이상의 울림을 갖는다. 읽는 이를 주먹 꼭 쥐고 울게 만드는 사랑이야기 <물의 연인들>은 그녀를 닮았다. 인터뷰를 위해 날 맑은 주말의 시내로 나가는 길, 전경들은 사신처럼 줄지어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고,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닭장차 때문에 공연인지 집회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서울광장의 대낮 같은 조명으로부터는 앰프 소리만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이러고도 우리가 아름다움을 믿을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위해 김선우를 만나봐야 했다. 정말, 언어로 혁명이 가능합니까, 묻기 위해서.
Profile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산문집 <김선우의 사물들>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과 천상병시상을 수상했다. <물의 연인들>은 그녀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지금 춘천에 살고 있다고 들었다. 오늘 인터뷰를 잡기 전에 서울에 나올 일이 있었다고. =한달 전(10월4일)에 제주 강정마을에서 생명평화대행진팀이 출발했다. 생명평화대행진팀은 쌍용, 용산, 강정 문제를 다 함께 다루는데, 한달 동안 전국 여러 갈등지역을 순례하고 어젯밤에 서울에 들어왔다. 오늘(11월3일) 여의도를 순례하고 오후 6시에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는다. 한달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나도 인터뷰 끝나면 서울광장으로 간다.
-대학 때부터 글을 썼나. =1학년 여름에 광주 사진을 보고 쇼크를 받아서 급격히 운동권이 되는 바람에 시를 쓴다고는 해도 가두시위용으로 쓰던 시가 훨씬 많았다. 운동권 문학동아리를 만들면서 그때 책을 참 많이 봤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권으로 지낸 세월을 후회도 하지만 나는 다시 살아도 그렇게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때가 아니었으면 읽어보지 않았을 광범위한 인문사회과학서를 읽어댔다. 내가 지금 작가로 사는 데 필요한 스펙트럼을 다 얻은 것 같다. 그때 아니었으면 내가 세계 철학사를 뒤지고, 아름다운 혁명가를 만나고 그랬겠나.
-시작(詩作)도 한 건가. =혼자 쓰다가 학교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유는 불온했지만. 원래 학교에 운동권 문학동아리가 없었다. 이른바 순수문학 동아리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운동권이 어떻게 시를 쓰냐는 거다. ‘슬로건이 어떻게 시란 말이냐’ 이런 반응. 그래? 어디… 좋아, 그러면, 시? 알았어. 그렇게 대학문학상 응모용을 썼다.
-어딘가 엄친딸의 ‘나의 성공담’ 같다. (웃음) =응모용으로 썼는데 정말 당선됐다. (웃음) 진짜 통쾌했다. 우리가 만들었던 동아리 이름이 북한강이었는데, 당선소감으로 ‘북한강 동지들과 술 한잔 퍼지게 해야겠다’고 쓰고. 학교다닐 때 시로 등단한다는 생각이 없었던 건, 제도권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나는 좋은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 좋은 활동가가. 문학을 좋아하고 좋은 시집들을 끊임없이 읽었지만 그건 양식 같은 것, 읽지 않으면 나 자신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읽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등단을 하기까지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텐데. =힘들었다. 혁명의 이념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적으로 무너지지 않았나. 그러면서 졸업과 함께 가려고 했던 현장선들이 사라졌다. 매우 어정쩡한 자세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접점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이 힘들고 길었다. 졸업을 했으니 사회인인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그렇게 그냥, 나는 지금 떠도는 중이다. 나는 지금 바닥에서 떠도는 중이다. 나는 올라가고자 하는 희망이 없다. 2년 정도 지나니까 진짜 유령 같아지더라. 그러다가 절집에서 갑자기,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언니를 만나러 절집에 갔는데 언니가 없었다. 요사채에 이부자리를 가져다준 어린 비구니 스님이, 딱 봐도 어린 나보다도 어린 것 같았는데, 작은 앉은뱅이책상 하나뿐인 방이었는데, 나가려다가 돌아보더니 “출가하시려고요?” 하고 묻더라. 그렇게 보였겠지. 여자애가 서늘한 얼굴로 혼자 절집에 왔으니. 내가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마치 화두를 받은 것처럼. 그분은 나가고, 나는 그 질문에 매달려 있었다. 출가를 하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출가를 하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막 섞여 있다가, 방에 놓인 앉은뱅이책상 서랍을 쓱 열어봤는데 반달빗이 하나 있더라. 조금 전에 나에게 “출가하시려고요?” 하고 물은 비구니도 어쩌면 출가할까 말까 이런 방에서 이런 빗으로 자기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빗었을지도 몰라… 하는, 짠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선험적으로 들었다. 그 방에 들이치는 햇빛을 가만히 그렇게 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갑자기, 시인이 되어야겠다. 빗을 앞에 놓고. (웃음)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했다. 등단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등단이라는 건 단순히 시를 써야겠다가 아니라 제도권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문학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갈가리 찢어졌다고 생각했고 깨져버린 운동권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련이 있었던 거다. 그런 마음과 함께 문학을 통해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제도권에서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년 정도 죽어라 시를 쓰고 등단을 했다.
-용산 시위나 희망버스, 강정마을에서 문인을 만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런데 지금 작가들이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은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이 있다. 예전의 참여문학이 했던 것과는 방식이 다르다고 할까. 시와 소설과 행동이 얽혀 있지만 또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등단을 하는 동시에 나에게 작가로서의 최고의 지상명령은 최고의 문학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 었다. 제도권 문단에서 강력하게 나를 지키고 힘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내 문학 앞에서 토를 달 수 없게 최고여야 한다는 게 내게 지상명령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쓰는 글을 최고로 높이려는 개인적인 욕망은 당연한 것이지만, 거기에 한겹 더 나를 강제하는 것. 문학적으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는 글만 쓴다. 그게 무엇이든. 그렇게 써왔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2007년에 세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가 나왔다. 내가 시로 갈 수 있는 하나의 정점을 지금 찍었다고 판단했다. 그 시집이 최고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문학 여정에서 한 굽이를 넘었다는 생각. 글쓰는 자로서 세상에 내놨던 여성의 이야기, 생명성에 대한 이야기를 체득한 경험에서부터 꺼내놓는 것으로는 최고까지 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것을 개척해가야 하는 시기다, 하고 판단했다. 세 번째 시집을 내고 시집 서문을 쓰는데, 당분간 시를 발표하지 않겠다고 썼다. 그때부터 소설을 썼다. 계기는 그전부터 있었다. 조세희 선생님께서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하셔서 언젠가 때가 오겠죠, 했던 게 그때가 되었다.
-조세희 선생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시며 이유도 말씀하셨을 텐데. =내가 소설 쓴 것을 본 적이 없으시잖나. 쓴 적이 없었으니까. 첫 시집을 내고 얼마 안되어 <한겨레>에 독서 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전화하셨더라. “아실지 모르지만, 조세흽니다”라고. 조세희 선생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정말 내가 많이 사고 주고 했던 책이었으니, 전화 받고 정말 깜놀했지. 긴 통화를 했다. 궁금하셨던 것 같다. 젊은 글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혁명은 언제나 긴급하다’라는 제목이 달린, 에른스트 블로흐 책에 대한 서평이었는데, 요즘 운동권 애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하셨던 듯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 그러면서 소설을 써보라고 하셨다. 시는 매우 위대한 장르지만, 조세희 선생님은 소설적 언어를 더 믿고 있는 분이다. 소설은 비루함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것이 더 혁명적일 수 있다는. 여태도 혁명이 긴급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시인에게 소설도 꼭 같이 한번 써보라고 하고 싶으셨다고.
-그 말로부터도 한참 시간이 흘러서 소설을 쓴 셈이다. =두번째, 세 번째 시집이 나오고, 한 고비가 여기다 생각이 드니까 소설이 오기 시작하더라. 동시에 시라는 장르로 할 수 있는 문학적 실천의 힘이 얼마간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시는 나에겐 체질적인 것이고 공기 같은 거라서 죽을 때까지 나는 시인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세상이 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시 장르를 통해서 세상에 하고 싶은 또는 세상이 그렇게 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궁구할 수 있는 것을 시를 통해 충분히 발현하기가 어렵더라. 그래서 좀더 구체적인 모색을 하기 위해서는 장르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시는 어쨌든 인간의 내적 혁명에 기여한다. 내부의 평화와 내부의 아름다움의 감각과 내부의 율동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내재하는 것이고 하드웨어적인 외적 혁명에 봉사할 수 있는 언어는 소설적 언어가 훨씬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다 함께 있다.
-요즘에는 아포리즘이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소비되다 보니 길지도 않은 시를 행갈이도 무시하고 맥락에서 뚝 떼어 소개하는 일이 많아졌다. 시가 아포리즘처럼 가장 그럴듯한 부분만 재생산되는 상황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화가 나지 않는다. 안타까울 뿐. 시 한편을 읽는 일이 주는 즐거움, 5분 정도 시 한편을 읽을 때 그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풍부한 시간이 되어주는지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 좋은 시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독자가 5천만명 중에 5천명도 안된다니 얼마나 손해인가. 오죽하면 이렇게 문장이 유통되나 싶으면서 동시에 이렇게라도 시적인 문장들이 유통되고 있다는 것, 블로그에 시를 옮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모든 블로그에서 시가 모두 사라진다면 오히려 그날이 얼마나 섬뜩할는지. 시를 퍼나르다 보면 원문이 훼손되는 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물의 연인들>은 어떻게 시작했나. =2009년 12월 4대강 예산이 통과된, 그 벌집 쑤셔놓은 것 같던 국회. 그전에 야당들이 막았어야지. 죽어라 막겠다고 생각했으면 못 막지 않았을 텐데. 그 밤부터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기 시작하더라. 그러고 봄이 와서 4대강 첫 삽 떴다는 기사가 뜨고 싹들은 돋아나기 시작하고 세상은 아름다워지기 시작하는데 미치겠더라. 저기 안 보이는 어떤 곳에서는 강을 자로 재로 끊어내기 시작하는데, 신록이 물오르고 아름다워지기 시작하면서 눈병난 것처럼 줄줄 울고 다녔다. 예쁜 꽃망울을 지나면 막 눈물이 나. 신록이 막 반짝거리는데 나는 계속 눈물이 나. 그러면서 뭘 쓰기 시작했다. 화가 생긴 거겠지. 처음에는 칼럼을 썼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번이지. 김선우가 쓰는 칼럼이 만날 그런 식이면 누가 보겠어. 결국 일기쓰듯이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봄이 다 갈 때쯤에 내가 쓴 것들을 보는데, 이것은 소설이 되고 싶어 하는구나를 정확하게 알았다. 지독한 폭력(강을 파헤치는 저 짓거리와 다르지 않은 일)을 당한 모녀와 한국에서 버려진 성인 남자 커플, 그리고 자연의 아이들인 소년과 소녀. 그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걸 소설로 만들어야겠구나. 그래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2010년에 초고가 나온 뒤 몇번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는데. =처음 쓴 것은 생짜 분노였다. 구체적인 지명들, 사건들이 르포처럼 들어가 있었다. 1400매였다. 그사이에 남한강을 수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강이 달라지는 걸 보고 있으려니 몸이 못 견디겠더라. 그래서 인도 오로빌로 갔다. 계약된 책이 있기도 했지만 쉬지 않으면 죽겠다는 생각에 소설을 덮어놓고 갔다. 그리고 다녀와서 원고를 열어본 거다. 와. 새벽까지 원고를 다 읽고 동이 트는데, 이것은 소설이 아니구나. 피튀기는 문장들, 피튀기는 현장의 이야기들이, 내가 르포를 썼구나 싶었다. 이제 절반을 덜어야겠군. (웃음) 다 덜어내 900매 정도로 만들고 다시 서너달이 지나 시집이 나온 뒤 다시 한번 볼까 하고 열었다. 다시 900매짜리를 반 토막 내고 새로 쓰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씨앗, 수린과 해울이라는 자연의 아이들이라는 씨앗, 유경과 엄마, 유경과 요나스. 이 씨앗만 처음 그대로인 채로 둘러싼 껍질들을 자꾸 벗겨냈다. 처음 초고를 쓸 때는 고통스러웠는데, 마지막 작업을 할 때는 좋았다.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낭만적인 질문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자연과 호흡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사랑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야 더 잘살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아픈 마음도 있지 않나. =두려움. 외부적인 폭력은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폭력은 존재할테지만 시스템적으로 그런 폭력이 양산되는 사회는 만들지 않아야 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그런 폭력을 양산하는 사회다. 그러니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선거를 통한 것, 그리고 비정치적인 다른 다양한 방법으로 시스템을 바꾸고 보완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모든 폭력이 근절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적인 성향과 제도적으로, 복합적인 이유에서 폭력이 발생하는데, 그것에 대해 움츠려들고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꼭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사랑하지 않고도 살 수 있지. 사랑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손해가 나겠지. 어차피 한번 사는 거고.
-좋은 것을 굳이, 하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 =상처받지 않고 조심조심 살면 뭐하겠어. 어차피 사는 거 평생 뜨겁게 사랑하고 살고 있다는 느낌, 그런 자기 충만감을 누리며 사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얼마나 천차만별인가. 그러니까 더더욱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것을 취하려면 줘야 하는 카드도 있는 거야. 두려움으로서의 한 발짝. 나머지는 저마다의 몫인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