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_<여학생> 6월호 표지 장정, 김기창_<소학생> 54호_표지 장정.(왼쪽부터)
기간: 12월16일까지 장소: 성북구립미술관 문의: 02-6925-5011
늦가을 서울 성북동을 걷는 일은 꽤나 멋진 일이다. 해마다 두번씩 긴 줄이 서는 간송미술관이 있고 소설가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이 있으며, 화가이자 미술평론가 김용준이 이태준에게 물려받은 집 노시산방 터가 있다. 작은 언덕과 골목길들 사이로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요즘이다. 그렇게 걷다가 문득 인사동이나 청담동의 하얀 갤러리가 아니라 성북구청이 운영하는, 전시공간으로서는 생소한 성북구립미술관에 발을 옮겨봐도 괜찮을 것 같다. ‘순수시대’라는 전시 제목도, “수려한 자연환경을 방패 삼은 성북동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아 창작 활동을 해온 10인의 작가를 조명”한다는 전시를 소개하는 문구도 느릿느릿한 말투로 어눌해 보이지만 요즘 미술 전시에서 보기 힘든 담백함이 느껴진다. 이곳에는 성북동에서 태어나거나 이곳에 작업실을 두고 사는 작가 김환기, 권옥연, 서세옥, 최만린, 변종하, 윤중식, 김기창, 김용준, 변관식, 전뢰진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엇비슷한 시대, 같은 동네를 경험했던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특별히 ‘성북동 비둘기’ 같은 시어처럼 성북동 동네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동네주민을 대화상대로 삼는 커뮤니티 아트도 도시 리서치도 아니다. 전시장의 작가들은 모두 성북동 안에서 타인보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좀더 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어린이나 청소년기의 모델을 두고 그린 드로잉이나 책표지 및 삽화 자료가 많다. 김환기가 그린 <여학생> 6월호의 표지 장정은 김환기의 달 항아리 그림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앞머리를 뱅 스타일로 똑 자른 여학생의 새초롬한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김기창이 만든 <소학생> 54의 표지라든가 바다에서 수영하는 까까머리 소년들을 그린 김용준의 <소학생> 표지, 조각가들이 연습 삼아 만든 듯한 작은 조각품들은 성북동의 풍경처럼 아담하고 친근하다.
요즘 우리 동네는 거의 한달에 한곳씩 새로운 카페가 생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대로변에는 대규모 커피 체인점이 건물을 통째로 사버렸다. 재개발과 공사가 한창인 이 도심의 거리에서 너무 한가한 되새김인지 모르겠지만 1930, 40년대 화가 김환기와 김용준, 소설가 이태준은 성북동 주민으로서 깊은 우정과 취미를 공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자기를 수집하고 그렸던 화가 김환기는 유리창 바로 밑에 가장 귀한 백자들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길을 지나가는 이들도 이를 볼 수 있도록 한 것 같다고 화가 김환기의 가족이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