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경 시나리오작가의 ‘스크린라이팅 워크숍’ 지상중계
캠퍼스는 북적거려야 다니는 재미가 있는 법인데 학교를 다시 찾은 10월17일은 어째 좀 한산하다. 하늘이 청명한 걸 보니 모두 가을 나들이라도 떠난 건가 싶었다. 설마 그런 낭만적인 일이 있을 리가. 중간고사 기간이란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온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역시 중간고사에 돌입했다. 이날 들어야 할 수업은 정서경 시나리오작가가 진행하는 ‘스크린라이팅 워크숍’이라는 스크린라이팅 트랙의 수업이었다.
<친절한 금자씨>(2005),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 등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 세편의 공통점은? 모두 정서경 작가가 각본을 썼다. 세간에는 ‘박찬욱 전속작가’라 불릴 정도로 박찬욱 감독과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해온 그다.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업하면서 ‘고민하는 동안 한줄이라도 더 쓰는 게 낫다’, ‘막히면 1신부터 다시 쓰면 된다’ 같은 실전 작법을 깨우친 일화며, 영상원 시절 스승인 홍상수 감독의 수업 때 “어차피 너희들은 시나리오를 못 쓴다. 써도 걸레다. 그러니 빨리 끝내는 게 중요하다”는 홍 감독의 말을 듣고 수업을 듣는 학생 중 가장 빨리 시나리오를 제출한 일화는 몇번을 들어도 재미있다. 그래서 다소 유별난 캐릭터인 그가 가르치는 수업이 어떤 풍경일지 궁금하던 차였다.
다른 파트 사이에서 어떻게 제 목소리를 내야 할까
강의실에는 세명뿐이었다. 정서경 작가와 스크린라이팅 트랙의 학생 둘.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정서경 작가와 김혜민 학생은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다소 늦게 들어간 까닭에 대화 내용의 전부를 듣진 못했지만 사정은 대충 이러했다. 함께 영화를 만들기로 한 디렉팅 트랙의 감독, 프로듀싱 트랙의 프로듀서와 시나리오에 대한 의견이 다른데, 어떤 식으로 작가의 의견을 표현하는 게 좋을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시나리오를 고친 뒤 다른 파트와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둘의 대화는 정리됐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꽤 신선했다. 보통 시나리오 수업 하면 시나리오만 놓고 얘기하지, 시나리오작가가 감독과 프로듀서 사이에서 어떻게 제 목소리를 내는지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가 두 번째 교과과정인 ‘스크린라이팅 워크숍’은 한 학기 동안 장편 시나리오와 단편 시나리오를 각각 한편씩 써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두 시나리오의 아이템은 지난 학기 수업에서 기획, 개발한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한다. 이들이 내놓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디렉팅 트랙의 감독과 프로듀싱 트랙의 프로듀서가 합류해 한편의 장편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수업은 <씨네21> 875호에서 소개했던 김태용 감독의 수업과 연계해 있는 셈이다. 사실 정서경 작가가 ‘스크린라이팅 워크숍’이라는 수업을 맡으면서 스스로 세운 목표가 있다고 한다. “무(無)의 상태에서 첫줄을 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시나리오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정당한 의견을 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다른 파트의 학생들과 함께 시나리오 과정 자체에 대한 이해를 나누고 싶었다.”
이날 수업은 지난주 이루어진 중간고사 평가 내용을 학생에게 전달하고, 시나리오 쓰기에 대한 태도를 되짚는 자리라고 한다. 강의실에 불청객인 기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정서경 작가는 일단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 깨달은 게 하나 있다. 결혼 전 고양이를 키웠다. 고양이라는 존재는 내 삶의 이유가 되었고, 내게 자신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첫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클 때까지 고양이를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꿈에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시간이 지난 뒤 둘째아이를 낳으면서 고양이를 또 다른 곳으로 보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어찌할 수 없는 고양이와 나 사이의 관계의 결말이 너무 궁금하더라. 어쩌면 이야기도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풀리지 않는 관계에 대해 고민하다보면 한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달까. 삶의 과제가 너무나 스펙터클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시나리오작가로 성장할 수 있고,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이야기의 존재 이유인 것 같다.” 그의 경험이 학생들의 작업에 어떤 영감을 던졌을까 궁금했다.
작업한 시나리오를 보여주는 게 전부는 아니다
중간평가 점검은 계속되었다. 정서경 작가는 두 학생에게 작업 일지를 작성해볼 것을 권유했다. 매일 시나리오를 쓰면서 느꼈던 생각과 고민 그리고 감정을 일기처럼 기록하라는 얘기다. “작업 일지를 통해 둘이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글쓰는 모든 것을 기록해서 보내주면 내가 두 사람을 좀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정서경) “그러면 너무 시시콜콜해질까봐….”(학생) “아니다. 우리는 시시콜콜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쓰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인지 알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니까.”(정서경) 단순히 학생이 쓴 걸 교수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학생이 무슨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쓰려고 하는지를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다.
그리고 정서경 작가는 시나리오가 막혔을 때 경계해야 할 팁도 함께 꺼냈다. 그것은 화자의 시점이다. 이야기가 막혔을 때 그 상황 안에서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야지, 주어진 상황 자체를 이야기가 되게끔 바꾸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작가의 시점이 신의 위치에서 사건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작가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해결책을 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도 있다.” 사건을 전개하다가 막혔을 때 사건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건에 처한 인물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소리다.
영상원 시나리오과 출신인 그는 시나리오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안다. “한 반, 한 강의실에 50명 넘게 들어간 고등학교, 대학교와 달리 영상원은 한 수업에 5명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구조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발견하고 관심있게 지켜보기가 수월하다. 그런 것처럼 나 역시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가진 능력을 끄집어내고 싶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올해 말에 내놓을 그들의 시나리오가 읽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