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예술가를 ‘천재’(genie)로 규정했다. 이는 ‘장인’(meister)이라는 고전주의의 예술가상과 확연히 구별된다. 장인은 오랜 학습을 통해 습득한 예술의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다. 천재는 다르다. 그는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제정하는 사람이다”. 낭만주의의 예술가는 이렇게 타고난 재능에 따라 예술의 규칙을 제정하는 입법자다. 흔히 “타고난 예술가가 있듯이 타고난 비평가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입법자로서 비평가도 존재하지 않을까?
당연히 그런 비평가가 있었다. 가령 17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에 ‘바로크’ 취향을 관철시킨 로제 드 필. 그는 ‘회화의 본령은 윤곽이 아니라 색채에 있다’는 새로운 미의 규칙을 수립했다. 한 세기 뒤 또 다른 비평가가 등장하여 로제 드 필의 입법을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18세기 말 유럽은 바로크 양식의 절정에 있었다. 독일의 비평가 빙켈만은 이 색채의 소란함을 잠재우고 윤곽을 중시하던 고대의 양식으로 되돌아가라고 외침으로써 ‘신고전주의’라는 새로운 예술언어의 입법자가 된다.
사실 예술의 입법자라는 관념은 20세기 이전에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양식의 변화는 수백년에 한번씩 일어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비평은 ‘기준을 제정’하는 활동이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기준에 따라) ‘작품을 평가’하는 활동이었다.
이 역시 예술문화의 안정적 재생산에 필요한 일이기는 하나, 예술의 격변기에 이 비평의 보수성은 치명적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 예술사는 그 재능을 미처 알아보지 못해 천재를 박해한 악명 높은 비평가들의 예로 가득 차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 비평의 논리에 급진적 변화가 생긴다. ‘작품이 기존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느냐’가 아니라, ‘작품이 기존의 규칙을 얼마나 일탈했느냐’가 비평의 기준이 된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예술문화다. 과거의 비평이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판정했다면, 현대의 비평은 작품이 얼마나 ‘새로운지’를 판정한다. 저마다 새로움을 표방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진정으로 의미있는 새로움이 어느 것인지 가려내는 안목. 그것이 현대의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된다.
예술과 비평의 상보성
문제는 ‘새로움’을 판정하는 뚜렷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면에서는 새롭고, 어떤 면에서는 낡았다. (내가 즐겨하는 농담이 있다. “작품이 새롭다고 말할지, 낡았다고 말할지는 작가가 나를 대하는 태도의 함수다.”) 나아가 저마다 제가 새롭다고 아우성치는 작품들 중에서 ‘진짜’ 새로움과 ‘가짜’ 새로움을 가리는 기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 기준은 사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비평을 통해 사후에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비평은 입법의 기능을 한다. 아도르노는 현대예술에서 작품과 비평의 상보적 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즉 과거의 비평이 작품이 완성된 뒤에 들어갔다면, 오늘날의 비평은 이미 작품을 성립시키는 단계부터 관여한다는 것이다. 가령 뒤샹의 변기를 생각해보자. 그가 창조한 것은 전통적 의미의 작품이 아니라, 변기마저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새로운 기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였다. 뉴먼이나 로스코 역시 자신들의 작품을 ‘획기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현대의 작가들은 종종 창작과 비평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한다. 물론 창작과 비평이 인격적으로 분리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잭슨 폴록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말수가 적은 그를 대신하여 그의 작품을 기념비적 업적으로 만들어준 것은 클레멘트 그린버그라는 탁월한 비평가였다. 그린버그의 비평이 없었다면, 잭슨 폴록은, 아니 50~60년대의 미국 모더니즘 회화 전체는 오늘날과 같은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큐레이터로서 비평가
비평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은 아마도 전시회 카탈로그에 실리는 것이 아닐까? 전시회는 예술의 새로운 경향, 유파, 양식이 성립했음을 선언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예로는 ‘인상주의’를 성립시킨 ‘낙선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현대예술의 다양한 흐름은 전시회를 통해서 비로소 제 ‘이름’을 얻거나, 혹은 현대적 예술의 경향으로서 예술적 ‘자격’을 얻었다. 이는 전시회 자체가 일종의 비평임을, 그것도 매우 강력한 형태의 비평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큐레이터로서 비평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비평의 활동이 굳이 평문이라는 문학적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전시회를 기획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예술적 상황에 대해 가장 강력한 비평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전시회의 기획은 예술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지시하는 사실상의 입법 활동이며, 전시회에 참여할 작가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 자체가 어느 작가들이 미래의 흐름에 가장 부합하는지 평가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위기’를 의미한다. 내가 아는 어느 작가는 작가 인터뷰에 갔다가, 큐레이터가 다른 작가에게 전시의 취지에 맞게끔 작품을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고 참여를 포기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큐레이터가 창작자, 다시 말해 작가의 작품들을 몽타주하여 전시회를 창작하는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가 된 셈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비평도 점차 ‘작품 평’에서 ‘전시 평’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큐레이터의 기획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구입자로서 비평가
비평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창작에 피드백을 주는 것이라 할 때, 큐레이팅 못지않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작품의 구입이다. 아무리 예술혼에 불타는 작가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팔리는 작품을 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이나 사설 미술관에서 컬렉션을 위해 구입할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유물론적인 비평이라 할 수 있다. 그 행위를 통해 미술관은 작가들에게 앞으로 창작되어야 할 작품이 무엇인지 강력히 지시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판결이 입법적 기능을 갖듯이(그것을 ‘판례’라 부른다), 훌륭한 구입 역시 입법적 기능을 할 수 있다. 잠재성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때로는 탁월한 비평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미술관에서는 대개 이 모험을 피해 검증된 작품만 구입하려 한다. 이 경우 예술의 ‘진보’는 어려워진다. 작고한 김점선 작가는 사석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갤러리를 위한 작품은 만들지 않을 거야. 갤러리에서는 4년 전 작품을 달래. 그럼 내 작품을 못하게 돼.”
컬렉터들 역시 비평가의 역할을 한다. “한국 미술동네에는 청와대에 살지 않는 ‘또 다른 대통령’이 있다. (…) 미술인 누구나 그를 ‘지존’으로 인정한다. 가끔 미술관, 화랑가를 찾으면 ‘알현’을 하려는 화랑주들과 작가, 기획자들이 몰려온다. 자기네 작품을 설명하고 한번이라도 눈길을 받으려고 안달이다. 그가 유심히 본 미술품은 당장 인기 그림이 된다. 기하학적 화면의 미니멀리즘 그림을 좋아하는 그는 서구에서 30년 전 끝난 이 그림풍을 1990년대 이후 한국 화랑가의 최신 유행으로 만들어내는 괴력도 보여주었다.”(‘위태로운 미술지존 홍라희’ <한겨레21>, 2007년 12월6일자) 화랑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거기서 그녀는 거의 재림예수였다. 죽은 나사로를 되살린 예수처럼, 그녀는 죽은 예술언어를 되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