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떤 이유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하 <참없존가>)을 다시 읽고 있는데, 세상에, 이 소설이 이렇게 야한 소설이었나, 새삼 놀라고 있다. 보호색을 내뿜는 숲속의 짐승들처럼, 철학적인 문장 사이사이에 ‘야릇하고 므흣한’ 문장들이 빼곡하게 숨어 있다. 소설을 처음 읽었던 것은 1992년이었고 그 시절 나는 철원의 한 부대에서 군인으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이런 소설을 읽게 내버려둔 부대장의 안일한 관리체계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 바다. 책의 속표지에는 의젓하고 번듯하게 포대장이 확인 사인을-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부대로 반입되는 모든 책에 부대장의 사인을 받아야 했고, 나는 포병이었으므로 포대장이 사인을- 해두었는데, 분명 <참없존가>가 얼마나 군의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책인지 몰랐을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투력 자체가 없었던 군인이었으니 책을 읽으나 읽지 않으나 별 상관은 없었겠지만.
군대에서 이 책을 서너번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참 신기하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참없존가>를 어찌나 좋아했던지 보초를 서러 갈 때도 가슴에 책을 품고 갔었다. (전방도 아닌 데다) 워낙 외진 탄약고 초소여서 구경 올 사람도 없었고, 노크를 할 사람도 없었다. 좁은 초소 안에서 플래시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이곳이 어디인지 잠깐 잊을 수 있었다. 다시 들여다보니 어째서 시간이 그토록 빨리 지나갔는지 알 것 같다. ‘두 사람은 정사를 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비명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같은 문장을 읽으면서 스물두살의 남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용하고 조용한 철원의 숲속에서, 산짐승들이 마른 숲을 지나가는 소리만 가끔 들리던 산속에서, 그 남자는 어떤 소리를 들었을까.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귀가 먹먹해지는 기분이다. 소설에는 뒤이어 이런 문장이 나온다. ‘테레자의 비명은 감각을 마비시켜 보고 듣는 것을 차단하려 드는 것 같았다.’ 나 역시 테레자의 비명을 들으며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려 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부터 소리에 예민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깥으로 나 있는 귀는 외부의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쫑긋 세우고, 내부에 있는 또 다른 귀는 주인공 테레자의 신음 소리를 듣기 위해 쫑긋 세우고 책을 읽었으니 이때부터 ‘멀티 히어링’이 가능해지지 않았나 싶다. 얼마 전에는 가인의 새 노래 <팅커벨>이라는 곡을 듣다가 숨소리가 어찌나 섹시하던지 듣는 내내 숨죽이고 소리에 집중했다. 가인의 숨소리에도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었다. <팅커벨>에는 수많은 소리의 레이어들이 콜라주되어 있었고, 가인의 숨소리 역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악기의 소리 같았다. 섹시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