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을 앞두고 모처럼 서울에 올라가서 우리 커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극장에서 <피에타> 보기였다. “전은 무슨 전. 그런 건 언제든 부쳐먹을 수 있어. 추석도 앞으로 한 삼십번쯤 더 남았고, 가족들한테 잘할 시간도 얼마든지 있고. 하지만 <피에타>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러니 어른들한테 욕먹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피에타>부터 보자.” 그리하여 추석을 하루 앞둔 9월29일 토요일 오전, 우리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피에타>를 봤다.
솔직히 놀랐다. 영화가 시작되고 늘 그렇듯 처음엔 김기덕 영화 특유의 불편함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가리기도 하고 몸을 비틀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인간이 얼마나 극악무도해질 수 있는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넘어 저마다의 인간이 실은 사랑이랄지 인정에 굶주린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처음으로 자기 죄와 사랑에 동시에 눈뜬 악당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고통 속으로 극단적으로 몰고 가며 속죄할 수 있는지 너무도 영민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둘 다 너무 악랄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남녀주인공에게 동화되어 어느새 눈물이 뚝 떨어질 땐 “아, 내가 졌다” 하는 기묘하게 상쾌한 패배감마저 들었다. 게다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그 길고 긴 피의 엔딩 신이라니…. 엄청난 충격과 감동 속에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얼어붙은 듯 앉아 있다가 우리 커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눈을 맞췄다. “오, 짱이다. 베니스든 뭐든 대상 받을 만하네.” “응, 한때 좀 옹졸해 보이기도 했던 자기 학대의 영웅이 이제 정말 거장이 된 것 같은데. 그치?”
며칠 뒤 시골로 돌아온 우리는 약간 심심해진 틈을 타 다른 사람들은 <피에타>를 어떻게 보았는지 살펴보았다. 네이버에 실린 일반 관객의 평은 예상대로 뜨거웠고 또 예상 밖으로 너무 깊이있어서 놀라웠다. 원고료 한푼 안 받고 전문가보다 더 성의있는 영화평을 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앞으로도 이렇게 대충 써서 밥먹고 살 수 있을지 나 자신이 걱정스러웠다. 그에 반해 실제 전문 영화비평가들이 쓴 영화평은 촌철살인도 하이쿠도 아닌 것이 어찌나 짧고 간결하게 매정하던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역시 전문가의 세계는 달라. 별 세개에 ‘혀를 깨물어 새기는 엔딩’이래. 별 두개 반엔 ‘슬픔의 폭력’이라고 쓴 20자평도 있고. 쉽게 감동하는 우리 같은 민간인이랑은 차원이 다르지?” 예술가다운 남편의 오묘한 반응에 맞추어 나는 나대로 나오는 대로 무식하게 나간다. “작가에 대한 예의도 없고 성의도 없어. ‘시적 표현을 포기했다’는 말은 뭐야? 시가 뭔지 알긴 아는 거야? 보들레르나 휘트먼을 좀 읽었다면 그런 얘긴 안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어느 하나 포장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를 직접 전달’한다니? 그래서 7점이라니? 그럼 포장값 부풀려진 백화점 추석선물세트 같은 영화가 좋다는 거야 뭐야? 게다가 <피에타>는 내가 보기에 최소한의 제작비로 뽑을 수 있는 최상의 미장센과 절제된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경제적으로 잘 짜맞춘 영화라는 점에서 그 이상의 포장은 아주 망하는 지름길 같은데….” 내친김에 요즘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는 도발적인 전언으로 시작되는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다시 읽고 있다. 열렬한 영화팬이었던 손택은 이렇게 썼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이다. 예술 작품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이바지할 비평은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