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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나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고 싶었다

<위험한 관계> 허진호 감독

그가 변했다. 멜로영화의 대가 허진호 감독이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위험한 관계>로 돌아왔다. 하나 이 영화에서 소위 허진호식 멜로의 흔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의 허리를 베어내며 사랑의 맨 얼굴을 들이밀던 그는 <위험한 관계>를 통해 화려하고 우아한 변신을 시도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감각적이고 세련된 화면에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바꾸었는지 이유를 물으려 찾아갔지만 얼굴을 마주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그런 생각은 눈 녹듯 사라진다. 비록 붓놀림이 바뀌었을지라도 그 속에 흐르는 섬세한 감정을 건져 올리는 솜씨는 변함이 없다. 다른 어떤 수사가 필요할까. 허진호는 허진호일 따름이다.

-중국 박스오피스 1위 축하드린다. =개봉 첫날 1위였다. 아직은 추이를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 =중국과 한국에 2번 연달아 개봉하려니 일정이 제법 빡빡하다. 그래도 많이들 관심을 가져줘서 힘이 난다. (웃음)

-이미 수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다시 한번 영화화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하루아침에 결정된 일은 아니다. 중국쪽 제작자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프로젝트였다. 고인이 된 배우 장국영과도 이야기를 나눴었다고 하더라. <호우시절> 작업을 하며 인연이 닿아 나에게도 제의가 왔는데, 한국에서도 이미 이재용 감독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만들기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였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보고 나서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원작을 읽은 적이 없었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읽은 건 제의를 받은 이후다. 당대엔 연애 교과서로 쓰일 만큼 연애 심리와 감정 묘사, 인간의 욕망과 긴장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라 무척 재밌게 읽었다. 프랑스 혁명 전야의 화려하고 퇴폐적인 시대배경도 마음에 들었고, 여러 가지 자료조사를 하면서 한번 작업해봐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떤 점이 끌렸나. =일단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고 싶었다. 이전까지 만들었던 영화들은 내가 기획에서 각본, 감독까지 모두 도맡아 했었는데, 원작이 있는 걸 영화로 옮긴다는 것에 대한 도전욕구가 생겼다. 이미 6번이나 영화화될 정도로 두터운 원작 속 감정의 결도 매력적이었다. 왜 이 작품이 계속 영화로 만들어질까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좀더 새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1930년대의 상하이라는 배경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1930년의 상하이가 어떤 시대인가. =빛과 모호함, 혼란이 뒤섞인 안개등 같은 도시다. 10년 단위로 묶어서 구분하는 것이 바보스러울 만큼 매년 분위기가 달랐던 격변의 도시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론 향락과 퇴폐가 뒤섞인 원작의 프랑스 혁명 시기와 유사하고 지금 현재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중국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억압, 기준, 규율들이 모호해지고 욕망이 폭발하는 시대, 퇴폐적인 동시에 매우 우아한 시대이기도 하다. <위험한 관계>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이러한 시대배경의 묘사와 포착이다.

-시대 묘사에 특별히 공을 들인 것 같다. =구체적인 시대 선정을 위해 중국의 엄가영 작가(<매란방> 각본)와 만나 여러 차례 수정을 했다. 처음에는 37년으로 잡았다가 중국 관객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어 31년으로 변경했다. 프랑스 혁명 전야처럼 불안한 공기가 팽배했던 시대 분위기가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버전의 <위험한 관계>들도 다 보았나. =<스캔들…>은 여러 번 봤고 스티븐 프리어스(<위험한 관계>), 밀로스 포먼(<발몽>)의 작품은 이번에 다시 찾아봤다. 작품마다 각각의 장점과 특색이 있는 것 같다. 일부러 다르게 만들려고 애쓰진 않았다. 변별을 하려 의식하면 할수록 더 헤매게 되더라. 나중에는 이것이 소설을 보고 받은 느낌인지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참 고민하다 이재용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다. <스캔들…> 때는 일단 시대를 옮겨가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부분들이 나왔다고 해서 31년의 상하이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결국 자연스런 변화를 보여준 것 같다.

-<위험한 관계>만의 변별점은 무엇인가. =이한얼 작가(<호우시절> 각본)와 함께 작업하면서 특히 고민했던 부분은 소설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좀더 생각해보잔 거였다. 이를테면 모지에위(장백지)와 셰이판(장동건)의 과거에 관한. 둘이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고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 짜나가면서 모지에위의 캐릭터를 좀더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베란다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그런 의도에서 멜로적인 느낌을 좀더 부각했다.

-확실히 악녀 모지에위의 드라마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반대로 뚜펀위(장쯔이)쪽의 드라마는 약해진 거 아닌지. =그런가? 뚜펀위 부인의 설정은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과부였다가, 남편이 있는 걸로 했다가, 다시 남편을 약혼자로 바꾸었다가. 중국에서의 사전 검열 문제도 있었다. 남편이 항일운동을 했던 우국지사인 걸로 설정했는데 그런 인물의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는 게 위험하단 얘기가 있었다. 결국 촬영 5일 전에 지금의 설정으로 결정이 났다. 인물 설정이 변하면서 시나리오의 축이 흔들린 감이 없지 않다.

-소품에 가까웠던 <호우시절>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어로 작업했다. 어려움은 없었는지. =당연히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중으로 작업해야 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우선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 통역 때문에 시간이 배로 걸리는 데 반해 주어진 시간은 더 촉박했다. 한국어, 만다린어, 베이징어가 뒤섞여 정신없었다. (웃음) 게다가 중국어는 4성조라 느낌을 살리기 어렵다. 현장에서는 장쯔이만 베이징어를 할 줄 알아서 많은 조언을 구했다. 대사도 많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끊어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흐름을 가지고 통째로 외워서 가야 하는 상황인데 현장에서 그때그때 대사도 많이 바뀌는 통에 배우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동건씨가 무척 고생했다고 들었다. =장동건씨에게 감사할 뿐이다. 정말 대단한 배우다. 연기만으로도 힘든데 대사도 다 외워야 하고 그걸 또 현장에서 일일이 바꾸고 있으니 힘들밖에. 처음에는 더빙도 괜찮으니 그렇게 가자고 했다. 그런데 할 수 있다고 매일매일 연습해오더라. 예상을 뛰어넘는 발음에 모두 놀랐다. 동시녹음이 70% 이상이었는데 버릴 게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일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괜히 배우가 아니다.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위험한 관계>는 이전까지의 허진호 감독님 스타일과 많이 다르다. =시대극에 규모도 크고 원작이 있는 이야기다.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왕 하는 거 완전히 바꿔보잔 생각이 있었다. 이제까지 찍은 영화의 컷을 다 합친 것보다 이 영화의 컷이 더 많을 것이다. <호우시절>에 함께 작업했던 김병서 촬영감독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배우면서 찍은 것 같다.

-결말도 색다르다. 엔딩을 바꾼 이유가 있나. =여러 방향으로 고민했다. 모지에위의 절규로 끝나는 버전도 있었고. 장쯔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좀더 따뜻하게 끝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 원작이 상류층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한 교훈적 작품이기도 했고. 뚜펀위가 정절을 지키려 하는 이유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남편이 존경받을 만한 교육자였다는 설정이 더해지면서 결말을 긍정적으로 가져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지에위의 경우에도 내적 징벌로 가볍게 마무리된다. =그게 가벼운 징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는 모지에위의 공장을 보여줄까도 생각했는데 모지에위에게 있어서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셰이판이란 동반자를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징벌이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솔직히 찍을 시간도 없었고. (웃음)

-최근 연달아 중국에서 작업했는데 한국 영화계와 분위기가 많이 다른가. =서로 장단이 있다. 일단 중국쪽은 촬영기간이 짧게 주어진다. <호우시절>은 30일, <위험한 관계>는 70여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스탭들도 무척 세분화되어 있다. 좋은 점도 많지만 너무 세분화되어 있는 탓인지 책임지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문제가 생기면 누가 해결해야 하는지 토의하느라 현장에서의 대처가 느린 감이 있다. 하긴 요즘은 한국영화 현장도 어렵다고 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한국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 늘 영화를 하고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너무 오래 쉬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 (웃음)

-현재 준비 중인 작품은. =덕혜옹주에 관한 영화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꽤 오래전부터 진행하던 프로젝트인데 이런저런 외유를 하느라. 다른 프로젝트도 몇 가지 살펴보는 중인데 아직 밝힐 만한 단계는 아니다. 얼른 돌아와서 한국 관객과 만나고 싶다. 허진호란 이름을 까먹기 전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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