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절멸의 천사>(1962)와 <시몬 오브 더 데저트>(1965)의 조감독으로 참여한 후부터 ‘루이스 브뉘엘의 적자’라 불리기 시작한 아르투로 립스테인은, 흔히 ‘도덕적 잔혹성’의 코드에서 브뉘엘의 연장선에 놓여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영화의 내재적 경향에서 그는 오히려 로베르토 로셀리니나 비토리오 데 시카 같은 이탈리아 뉴웨이브 작가, 혹은 이리 멘젤이나 유라이 헤르츠 등의 동유럽 뉴웨이브 작가군에 더 가깝다. 실제로도 립스테인은 2세대 멕시코 뉴시네마의 대표주자라 불린다. 토키영화 초기부터 희미하게 쌓인 프로덕션의 흐름이 깨진 60년대 중반, 멕시코 영화사가 2막을 맞이하는 가운데에 그가 버티고 있다. 그를 비롯한 펠리페 카잘스, 라파엘 카스타네도 등의 2세대 영화인들은 60년대 멕시코 시네마의 경향을 “아무런 괄목할만한 특성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이런 자가당착적 인식을 통해 그들은 독특한 자신들만의 작품 틀을 창조해간다.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하거나 규범의 엄정함에 거역하는 것, 기존 장르를 재해석하거나 마치 편집증 환자인 양 특정 주제에 골몰하는 모습도 눈에 띤다.
‘칠레-웨스턴’ 스타일을 차용한 <죽음의 시간>
립스테인에 대한 평가의 근저에는 특수한 집안의 환경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아버지 알프레도 립스테인은 유명한 영화제작자였는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쓴 <죽음의 시간>(1966)의 초고 판권을 산 것이 바로 그다. 데뷔작의 프로듀서도 그가 맡았으며, 당시 립스테인의 나이는 고작 21세였다. 차기작 <미래의 회상>(1968)를 만들면서 둘은 불화를 겪고 이후 업무상 결별한다. 1970년과 1971년 사이에 이루어진 도발적 단편 작업들은 따라서 2세대 영화인들과 어울린 결과물이다. 종종 인터뷰를 통해 <죽음의 시간>의 시놉시스를 자신이 소화하지 못했다고 밝히거나,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은 이를 온전히 자신의 작품이라 여기지 않은 탓인 듯하다. 그렇지만 당시 남미에 유행한 ‘칠레-웨스턴’ 스타일을 차용한 <죽음의 시간>은 결과적으로 립스테인의 필모그래피의 시작점에 놓인 작품이다. 무겁고 엄한 관습으로부터의 도피, 내러티브의 컨벤션 뒤에 혁신적 가치를 숨기는 태도 등이 이후의 작품 특성과 괘를 같이 한다. 게다가 올해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네 편 모두가 이 범주에 속하는데, 문학적 흐름에서 혁신적이란 평가를 받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도 공통적이다. 한편 가족을 사회의 축소판인 양 내민 경향은 2세대 감독들 전체의 특징으로 보면 된다.
브뉘엘이 거절한 영화 <순수의 성>
<순수의 성>(1973)을 처음 연출 제안 받은 건 브뉘엘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고, 립스테인은 기회를 얻었다. 50년대 멕시코시티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외부의 해악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가장의 결심 아래, 마치 종교 교리에 따르듯 18년간 가족을 감금한 가장의 이야기를 담는다. 하지만 아이들의 사춘기가 오면서 상황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상영시간 내내 내리는 빗줄기와 후반의 근친상간은 사뭇 서로 어울리며 음산한 결말을 향해 달린다. 처음 영화사에서 영화화를 추진하던 당시 할리우드 여배우 돌로레스 델 리오를 축으로 한 기획영화였다는데, 후에 연출자가 립스테인으로 바뀌며 할리우드가 아닌 국내 스튜디오로, 스타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제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잔혹하고 기이한 이야기 패턴이나 스타의 부재 등이 꽤나 브뉘엘스럽다. 주인공 클라우디오 브룩은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와 <시몬 오브 더 데저트>에 참여한 적 있으며, 아내 역의 리타 마세도는 <나자린>(1959)에 출연한 적 있다.
한편 <종신형>(1979)은 누아르에 속하는 영화인데, 이번에 초청된 영화 중 쇼트 커팅이 가장 많은 작품이다. 과거에 저지른 범죄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며 진행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때 ‘타잔’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소매치기와 포주 행세를 하던 자비에 리라다. 출소한 후 회개하고 평범하게 살고자 하지만, 부패한 경찰관 피에트로가 무리한 상납을 요구하면서 그는 다시 죄를 지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섬에 유배된 상황, 닫힌 구조에서 감독은 이번에는 가족이 아닌 ‘죄수와 간수의 관계’를 바탕으로 정의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건조하게 말한다. 카바레 등 서민적이고 친숙한 장소, 익숙한 동시대적 캐릭터를 누아르 풍의 화면을 통해 차별적이고도 새로운 시선으로 담은 것이 특징이다.
립스테인 작품의 전형 <시작과 끝>
그의 나이 41세에 완성한 <운의 왕국>(1986)은 물질적 탐욕과 질투의 로망을 다룬 일종의 우화다. 당시 립스테인은 ‘극도로 정제된 통찰력’과 ‘예리한 관찰’을 통해 작가적 반열에 오른 상태였는데, 이 작품으로 그는 ‘불운을 부르는 인간의 무지와 과오, 주변에 널린 매혹에의 힘이 어떻게 운명을 이끄는지’에 대해 처연하게 웅변한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가난한 경매인 디오니시오는 어머니가 임종하던 날, 죽어가는 닭을 구하는 일생일대의 아이러니를 맞는다. 이후 닭과 함께 투계장을 다니던 중 여가수 라카포네라와 만나는데, 그녀를 아내로 맞은 후 부적을 얻은 양 그에겐 항상 운이 따른다. 죽음과 삶의 패러독스, 운명에 거부할 수 없는 꼭두각시 같은 인간의 행적이 온전히 닫힌 구조 속에서 펼쳐진다.
<시작과 끝>(1993)은 가장의 죽음으로 파멸에 이른 어느 일가의 일대기를 담는다. 멜로드라마 풍이지만 대서사시처럼 느껴지는 이 대작은 아버지의 부재 후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 교체’를 꿈꾸는 어머니의 실패담을 보여준다. 어머니 이그나시아는 법대에 다니는 아들 가브리엘을 성공시켜 현재의 궁핍함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이를 위해 다른 자식들을 희생하면서 더 파멸에 근접해진다. 딸은 학교를 그만두고 바느질을 배우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고, 아들들은 일감을 찾거나 쫓겨나는 등 모두가 비극적이다. 어긋난 형태의 모성이 가져온 신랄한 결과,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한 사람이란 아예 없다. 이렇듯 메마른 현실을 통해 감독은 세계의 부조리를 영화에 응축시킨다. 어둡고 느리며, 의기소침한 이 영화의 기조는 립스테인 작품의 전형이라 이를만하다. 멜로드라마의 양식을 취하지만 결국 로맨티시즘은 없으며, 전체 쇼트가 팬과 트래킹의 ‘플랑 세캉스’인 것도 특징적이다. 마지막 9분에 육박하는 시퀀스 쇼트는 그중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