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특히 남자주인공의 인생이 초장부터 기구하기로 치면 이경희 작가의 드라마만 한 게 있을까.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차무혁, <상두야 학교가자>의 차상두, <이 죽일놈의 사랑>의 강복구 등. 곡절 많은 가족사와 비루한 삶 속에서 남은 혈육, 혹은 그 비슷한 사람을 위해 사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이 남자들은 생에 단 한번 이기적인 사랑이나 눈먼 복수에 에너지를 쏟아내다 그것도 의미를 잃는 순간 스러진다. 뭔가 충족되지 않은 채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백마 탄 왕자님의 반대편에서 ‘나란 남자 위험한 남자. 도망치려면 지금뿐’이라고 중얼거리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위악적인 제스처와 허기진 눈빛에 극중 수많은 여자들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정말로 풍덩풍덩 잘도 빠진다. <이 죽일놈의 사랑>에서는 강변에 놀러간 남자를 뒤따라간 여자가 다리에서 뛰어내렸고 KBS2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에서는 자기가 배신했던 남자 강마루(송중기)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한재희(박시연)가 아오모리의 바다에 뛰어들더라.
여자를 물에 뛰어들게 하는 남자에 관해 생각해본다. 그들이 암만 개미지옥 같은 매력을 지녔다고 해도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뛰어내리는 건 쉽지 않을 텐데…. 패턴을 보면 너 따위 내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듣고 언니들은 뛰어내렸다. 그리고 당신은 반드시 나를 구할 것이라는 확신을 안고 몸을 던졌을 것이다. 충격적인 볼거리 외에 극에서 노리는 효과는 위악적인 제스처의 극대화다. 여자를 구한 다음 물기도 마르기 전에 여전히 너는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못박는 남자의 서늘함. 그 서늘한 외피 아래 실은 그 누구보다 선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였을 과거나 숨겨둔 뜨거움을 병치시킨다. 그들의 내면을 가장 소극적으로 대변하는 이가 옆에서 속마음을 통역해주는 사람이라면, 목숨을 맡기고 물에 뛰어든 언니들은 가장 적극적인 케이스인 것이다.
위악적인 주인공들의 선한 내면을 설명하느라 벌어지는 불상사는 마루가 복수의 도구로 삼는 여주인공 서은기(문채원)에게서도 볼 수 있다. 어머니를 버리고 재희를 들어앉힌 아버지 서 회장에 대한 애증과 경영관 차이로 대립하는 은기는 거침없는 독설로 내면을 엄폐하는 여자다. 이틀 안에 노조의 파업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사직을 내놓아야 할 위기에서 서은기는 노조 간부들과 협상안을 걸고 술내기를 제안한다(그러라고 뽑은 노조위원장이 아닐 텐데!). 기막힌 장면은 사발에 소주를 부어 마시다 도망친 이튿날 노조 사무실에서 이어진다. “…두 번째, 직원휴게소 건립. 이건 도곡동 서초동 주상복합하고 오피스텔들 정리하면 얼추 가능할 테고. 세 번째, 조합원의 중•고등학교 학자지원금을 자녀 수 상관없이 전액 지원한다? 차하고 바이크, 엄마가 놓고 가신 패물, 그리고 펀드 모두 헐면 뭐 반 정돈 될 테고 나머진 대출로 어떻게 메워보면 오케이.” 덧붙여 해고된 노조원 아홉명은 그녀가 직접 고용해서 파견 형태로 내보내겠다는 약속까지.
노조의 요구를 통 크게 수용하는 은기가 멋지게 보이는가? 이건 마치 염치없는 노조가 엄마의 유품인 패물까지 털어가는 모양새다. 센 척했으나 “(술내기라도 하면) 저 아저씨들이 좀 귀여워서라도 봐주지 않을까 싶”었고 노조를 폭력으로 해산시키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는 은기의 진심을 치장하느라 조직 대 조직으로 협상을 거쳐 당당하게 받아내야 할 요구들과 노조의 존재에 굉장한 모욕을 끼얹고 말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스물아홉짜리의 머릿속에서 나온 치기어린 해결책이라 받아들여도, 허술해빠진 위악에 놀아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역시… 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