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원 감독을 만난 곳은 <점쟁이들> 제작사 사무실이 아니었다. 그는 벌써 네 번째 영화 <더 독>을 준비 중이었다. “시나리오 수정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그의 하소연은 개봉을 앞둔 여느 감독들의 푸념과는 달랐다. 알고 보니 <더 독>은 캐스팅까지 끝낸 상태였다. <점쟁이들>을 찍는 동안 ‘가께모찌’라도 한 것일까. 뜻한 대로 이뤄졌다면, <시실리 2km>(2004), <차우>(2009)에 이은 신정원 감독의 ‘코믹호러 3부작’은 <점쟁이들>이 아니라 <더 독>이 됐을 것이다. 지난해 초, <더 독>의 시나리오를 매만지던 그는 결국 다른 작가가 각본을 쓴 <점쟁이들>의 연출 의뢰를 받아들였다. 한시라도 빨리 현장에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전국 각지의 용한 점쟁이들이 원한을 품은 악령과 대결하기 위해 울진리에 모여든다는 설정의 시나리오를 받아든 그는 이번에도 자신만의 엉뚱하고 비틀린 유머를 뇌관처럼 심었다. <점쟁이들>의 시사회가 끝난 다음날, 신정원 감독에게서 그만의 기상천외한 웃음 폭탄 제조법을 들었다.
-머리 길이가 더 짧아졌다. =지난해에 귀찮아서 짧게 잘랐다. 감으면 말려야 해서 귀찮고. 두피가 굉장히 안 좋아졌고. 긴 머리 유지하면 과거 이미지가 그대로 갈 것 같아서. 대개는 이 머리가 더 낫다고 하는데 간혹 없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제(9월24일) 시사 반응은 어땠나. =언론시사는 별로였다. 배우들까지 민감해졌을 정도다. 그랬는데 VIP 시사 때 기분이 좋아졌다.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진행했는데, 3천석이 꽉 찼다.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서 보니까 다르더라. 술렁술렁하더니 나중엔 (웃음이) 터져나오고.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전작들과는 반대인 것 같다. 그땐 언론시사 반응이 더 좋았다.
-<시실리 2km> <차우>와 달리 이번엔 각본을 직접 쓰지 않았다. =내가 쓴 시나리오로 어떻게든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면 영화 한편 완성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리겠더라. 내 것으로만 하려면 적어도 3년은 걸리니까. <차우> 끝나고 양수리 근처에서 한 1년 머물면서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다간 몇편 못 만들 것 같았다. 캐스팅 상황도 지지부진했던 터라 제작사쪽에 양해를 구했다. <점쟁이들> 먼저 하고 오겠다고.
-아, 이거다 하는 시나리오였나. =눈에 딱 들어왔던 건 아니었다. (웃음)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데. (권성휘 작가는) 되게 좋아하는 동생이다. 다만, 초고가 <시실리 2km>와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연출을 의뢰했겠지만. <시실리 2km> 같은 영화를 다시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 퇴보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 골격이 튼튼해 보이지도 않고 참고할 레퍼런스도 많지 않아서 애먹겠다 싶었다.
-한국의 점쟁이들이 타이 여행 중에 단체로 접신을 경험한 지역이 알고 보니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었다는 에피소드가 원안이 됐다고 들었다. =배우 지진희씨가 여행 중에 가이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썼다. 그 설정 자체는 흥미로웠다. 제작자인 장원석 대표가 워낙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이라 거기에 넘어갔다. 하지만 그것 하나 가지고 이야기를 확장하려니 힘들었다.
-각색하는 동안 어떤 부분들이 수정됐나. =지난해 4월부터 9월까지 5개월 동안 7번의 수정고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추진력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인물들이 계속 고스톱만 칠 순 없는 것 아닌가. 점쟁이들이 모여서 뭐하는 거냐, 시간만 보내는 거냐,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고민 속에서 보다 거대한 힘을 지닌 악령이 필요했졌다. 수조원대의 보물선이 가라앉았다는 설정도 나중에 집어넣었다.
-점쟁이들 대 악령이 아니었다면, 초고의 대립구도는 어떻게 짜여져 있었나. =보물선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 마을 노인의 역할이 더 컸다.
-굵직한 액션장면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짰다. =<시실리 2km>는 되게 정적이었다. 카메라를 활용하는 방식도 그랬고.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보자 싶었다. 후반부의 추격전 장면에선 나도 배우들과 같이 호흡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들었다. 점쟁이들이 저주 걸린 마을에 와서 악령을 퇴치한다는 설정 자체로 승부할 수 있다고 보진 않았다. 캐릭터를 활용한 코미디는 가져가되, 어렸을 때 본 할리우드영화들처럼 치고받는 액션만으로도 만끽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코미디와 액션을 한데 붙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루하게 느끼지 않기 위해 긴박하게 몰고 가는데 그 안에서 웃겨야 하니까.
-그동안 겉과 속이 다른 캐릭터를 앞세워 독특한 코미디를 만들어왔다. 전작들에 비하면 그런 악취미는 다소 줄었는데. =그런 요소들을 다 뺐다. <차우> 끝내고 일반 관객이 내 성향을 많이 불편해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부분들을 편집에서 제하다 보니 캐릭터 설명이 잘 안되는 경우도 있다. 찬영(강예원)과 석현(이제훈)이 침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뒤에 좀 과한 설정의 베드신이 있다. 과일을 몸 위에 올려놓고 하는. 그걸 박 선생과 심인 스님(곽도원)이 또 훔쳐보고. 촬영장에선 끝까지 가보자 했고, 배우들도 그걸 즐겼는데, 3시간 30분 분량의 편집본을 정리하면서 다 쳐냈다.
-전국 각지의 점쟁이들이 버스에 올라탄 장면에서 미국인 목사가 갑자기 나온다. =모니터를 했는데 미국인 목사 밥이 비호감 캐릭터로 뽑혔다. 종교 비하 아니냐 이거지. 그렇게 사람들 생각이 닫혀 있는 줄 몰랐다. 우린 목사의 솔직한 모습일 수도 있다고 봤고, 그래서 굉장히 좋아했는데. 결국 등장 장면을 없앴다. 접신 때 목사가 들고 있던 십자가가 불타는 장면도 뺐고.
-촬영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애드리브를 무제한 허용했다고 들었다. 시나리오는 거의 레퍼런스였던 셈이다. 특히 박 선생(김수로)이 몰래 초코파이를 먹는 장면이 즉흥적으로 만들어 넣었음은 관객도 쉽게 알 것 같다. 이 장면에서 똑같은 상황이 세번씩이나 반복되는데, 안 웃고 배기나 보자 뭐 그런 내기를 거는 것 같더라. =시나리오 수정 때도 넣었다 뺐다 한 장면이다. 이게 정말 웃겨, 너무 유치한 것 아닌가 망설였다. 그랬는데 (김)수로 형이 뭘 한번 해보겠다면서 테이블을 옮겨 문을 막고 초코파이를 먹더라. 애초엔 승희가 막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설정이었는데 그러지 말고 뒷문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오니까 그런 동작이 나오더라. 세 번째 문을 여는 것을 (김)윤혜에게 몰래 한번 더 하라고 일러줬다. 그렇게 한번에 다 찍었다.
-배우를 실험대상처럼 썼는데. =그때 분위기가 좀 안 좋았다. (웃음) 수로 형이 화라도 냈으면 난감했겠지. 그런 점에서 다 받아준 수로 형에게 고맙다. 찬영이 악령 씐 청년(김태훈)에게 배를 빌려달라는 장면에서도 김태훈씨에게만 슬쩍 ‘돈있냐’는 대사를 쳐달라고 했다. ‘카드도 돼요?’라는 찬영의 대사도 그렇게 나온 거다. 백 포수(윤제문)가 수련(정유미)에게 갑자기 접근하는 <차우>의 산장 장면도 사전에 윤제문씨에게만 그렇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예전에 본 책에서 마틴 스코시즈가 가끔 이 방법을 써먹었다고 해서 나도 해본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준비되지 않았던 것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는 게 재밌다.
-컷을 일부러 늦게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 =배우들이 연기를 다 했는데 가만있으면 다시 연기가 시작된다. 자신들이 컷을 부를 순 없으니까. 근데 말이야 하는 식으로 대사가 계속되는 거다. <차우>에서 매운탕 먹는 장면을 찍을 때 물고기를 갑자기 끓는 물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뜨거운 물이 펑 튀어오르는 바람에 배우들이 모두 프레임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나 역시 배우가 다친 것 아닌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컷을 안 불렀다. 분명 사고인데 촬영감독도 계속 그 상황을 찍고 있고. 그랬더니 배우들이 다시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프레임 바깥으로 튀어나가고. 다시 들어와서 대화하고. 그런 식으로 하다보니 긴장감도 조성되고, 연기도 색다르게 나오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배우들과의 사전 조율도 다른 감독들의 방식과는 다를 것 같다. =일단 대본 리딩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대사 외우려고 읽는 것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하는 것과 현장에서 하는 것과는 완전 별개다. 나 역시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내 앞에 서지 않으면 상상이 잘 안된다. 그런 점에서 난 현장을 믿는다.
-이제훈은 카메라 앞에서 맘껏 즐기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강예원은 후반부로 갈수록 편하게 연기하더라. =제훈이는 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친구다. 그걸 깨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절벽에서 몇번 구르는 장면을 찍고 나선 변했다. 처음엔 적응을 잘 못했다. 예원이는 풀어주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줄 아는 배우다.
-<더 독>은 얼마나 진행됐나. =계약이 남았지만 캐스팅은 대략 끝났다. 엄태웅, 곽도원, 한예슬이 출연한다. 외계 바이러스에 감염된 개가 사람들을 해치는 내용인데, 전작들보다 훨씬 더 다크한 분위기로 끌고 가려고 한다. <차우> 끝내고 나서 기술적인 부분에서 미흡한 점을 많이 느꼈다.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서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