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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한짝, 그 속깊은 조연
2001-03-13

정윤수의 이창

김홍도의 그림 중에 <씨름>이 있다. 우리 옛 풍속을 담았다 하여, 다만 그것으로 걸작인가 헤아려보니 미술사학자들은 특히 그 미학적 구도를 거론한다. 그중 하나가 서구의 원근법과 상관없이 아래위의 구경꾼과 가운데 씨름꾼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이며 그 둘이 오른쪽 여백의 짚신 두 켤레다. 짚신이 무심한 듯 놓여 있음으로 해서 이 그림은 구도적 완성, 그러니까 중앙과 위아래의 긴장이 오른쪽으로 트임과 동시에 그 여백을 조그맣게 채움으로써 또한 긴장 속의 균형을 갖는다는 설명, 오늘 그런 얘기다.

케이블TV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빌려놓은 비디오도 없을 때, 마침 지나간 명화를 우연찮게 방영해서 필요 이상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OCN은 정도가 심해서 재탕에 삼탕, 아예 수십탕까지 반복하는 바람에, 나는 <저수지의 개들>의 농담을 외울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저께는 NTV에서 잭 니콜슨과 대니 드 비토의 <호파>를 재재재재방했는데, 그 바람에 나는 뜻밖의 재미를 얻었다.

대니 드 비토였다. 그는 트럭노조위원장 잭 니콜슨의 한발짝 뒤에서 주연 이상의 호연을 펼쳤다. 비디오와 케이블로 대여섯번이나 본 터였지만 그의 열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그야말로 조연의 진경산수를 곱씹게 해준다. 오직 그만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재방 요청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는 음모와 배신의 굴곡을 헤쳐나가는 호파의 동료이자 공모자로서 언제나 한발짝 뒤에 서 있는다. 잭 니콜슨의 대리인으로 변호사, 장관, 갱단 두목 등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의 작달막한 체구는 영화의 옥타브를 두세칸이나 낮춰버리는 지독한 연기로 변화하여 거구의 음모자들을 완전히 압도한다.

더불어 영화 <대부2>의 알 파치노의 경호원도 기억난다. 대사의 양으로만 볼 때 그는 엑스트라다. 세 시간 가까운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는(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대부 콜리오네의 회상 장면만 빼고는) 거의 모든 장면에 출연하는데 그 바람에 그 경호원 역시 영화의 대부분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영화 내내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알 파치노로부터 서너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 알 파치노와 운명을 함께한다. 그는 언제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연기한다. 문을 열어주고 브랜디를 따라주고 사람들을 제지하고 또는 그저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구석에 서 있는데 만약 그가 없었다면 알 파치노의 카리스마, 그 광휘는 상당부분 덜어내야 할 것이다. 중세 초상화 풍으로 명암을 대비시키는 조명과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촬영만으로도 온전한 알 파치노이겠지만 말없이(내 기억에 그는 정말 아무 말도 안 한다) 알 파치노의 뒤에 서서, 실체적 존재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러나 대부가 가볍게 손이라도 들면 문을 열거나 스카치잔을 들고 오는, 그야말로 그림자 충복, 근접 경호, 주연보다 뛰어난 조연보다도 뛰어난 엑스트라 연기의 위대한 면면을 그 사내는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까짓 짚신 한짝 없어도 그만이지만 그것이 있음으로써 긴장과 균형의 이중주가 완성되듯이 마치 조그만 점처럼 그 경호원이 항상 어두운 배경 저 구석에 충직한 자세로 서 있음으로 해서 알 파치노는, 그리고 <대부2>는 그 장엄미의 아우라를 더욱 짙게 채색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조연과 엑스트라의 리얼리티를 말하는 셈인데 이렇게 말하자면 금세 떠오르는 생각이 그것에 관한 우리 영화의 빈약한 처지이다. 색시집 포주에서 노회한 양반으로, 산막의 화전민에서 종로통 주먹으로 온갖 배역을 담당해온 저 기주봉, 진봉진, 이기주 등의 전통에서 최종원, 명계남, 권용운에 이르는 조연의 세계를 따로 기억할 수 있으나 문제는 배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들을 정확하게 그 자리에 있게 하는 미학의 완성도이다. 서랍 속에 양주를 넣어두고 홀짝홀짝 마시거나 범죄 현장에서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는 형사만으로는, 리얼리티는 고사하고 기초적인 캐릭터 형상화조차 구현될 수 없지 않은가. ‘맛깔스런 조연’이란 표현이 언제나 주연을 빛내는 코믹연기를 뜻하는 것은 그만 사절해도 좋지 않은가. 해당 화면의 중심 인물만 빼고나면 다들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른 체 서 있을 뿐이고 심지어는 기본적인 삼각형 구도조차 심하게 교란되거나 시선과 동선, 감정선이 불일치하는 혼란 상태를 보이기 일쑤 아닌가.

과연 김홍도의 짚신 두 켤레와도 같은 구도의 완성, 대니 드 비토나 과묵한 경호원의 압도적인 조연의 리얼리티를 실감할 수는 없을까. 내 아는 사람 중에 기관원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검은 양복을 거의 입지 않는다. 도대체 기자회견 같은 기자회견, 은테 안경을 끼지 않은 의사, 수술실 같은 수술실, 각혈을 하지 않는 시인을 만날 수는 없는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