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단어 ‘museal’(박물관 같은)은 불쾌한 배음을 갖고 있다. 그 말은 관찰자가 더이상 살아 있는 관계를 갖지 않고 죽어가는 과정의 대상들을 기술한다. 그 대상들은 현재의 필요가 아니라 역사적 측면 때문에 보존된다. 박물관(museum)과 묘지(mausoleum)의 연결은 음향적 연상 이상의 것이다. 박물관은 예술작품의 가족묘와 같다. 그것은 문화의 중성화를 증언한다.”(아도르노, <발레리 프루스트 박물관>) 아도르노의 말대로, 박물관은 정말로 예술작품의 무덤일까?
죽음이냐 부활이냐
위의 구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예술의 재화가 그 안에 비축되며, 그 재화들의 시장가치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앗아간다. 그럼에도 그 즐거움은 박물관의 존재에 의존한다.” 다분히 모순적 어법이다. 한편으로 박물관은 작품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앗아가나, 다른 한편 예술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박물관에 의존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여기서 아도르노는 두명의 프랑스 문인을 등장시킨다.
시인 폴 발레리에 따르면 박물관은 예술의 묘지다. 원래 작품은 고유의 공간 속에 있었다. 하지만 박물관은 교회나 궁정 혹은 거실에 있던 작품을 본래의 맥락에서 떼어내 한곳에 모아놓는다. 그렇게 박물관에 재화가 늘어날수록 감상은 외려 불가능해진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라. 컬렉션이 너무 방대해 질려버리지 않던가. 박물관에서 작품은 더이상 예술이 아니라 잘해야 ‘교재’로서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반면 프루스트에 따르면, 예술은 보는 이의 기억 속에서 비로소 작품이 된다. 아무리 내적으로 가치있더라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걸린 작품은 기억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박물관은 작품과 주체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작품은 박물관에 걸려야 비로소 예술이 될 수 있다. 프루스트에게 박물관은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생명을 잃은 작품을 묻는 예술의 묘지가 아니다.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처럼 예술은 그곳에서 삶을 얻는다.
발레리는 전통적 맥락에서 제대로 예술을 감상하던 엘리트의 시각을 보여준다. 그에게 박물관이란 예술이 ‘피상성’에 빠져 통속화하는 장소다. 반면, 프루스트의 견해는 박물관을 통해서 비로소 수많은 작품을 접한 만보객, 말하자면 아마추어 딜레탕트의 시각을 대변한다. 발레리가 (거의 하이데거의 어조로)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의 향수를 갖고 있다면, 프루스트는 (마치 베냐민처럼) 시대에 따른 제도의 불가피한 변화를 긍정한다.
박물관을 폭파하라
박물관을 죽음의 장소로 본 것은 발레리와 같은 문화보수주의자만이 아니었다. 가장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도 박물관을 무덤으로 간주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들. 그들은 “박물관을 파괴하라”고 외쳤다. 예술의 미래를 과거에 묶어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프루스트에게는 ‘아직’ 새로운 제도로 보였던 박물관이 미래주의자들에게는 ‘이미’ 낡은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미술관에 변기를 들여놓은 뒤샹을 생각해보라. 당시 이 작품(?)은 전시가 거부되었고, 전시장 한쪽 구석에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의 변기는 박물관이라는 제도에 대한 분변적(scatological) 조롱, 말하자면 박물관으로 상징되는 예술제도에 대한 공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물관은 예술을 원래 그것이 속하던 생활에서 떼어낸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그 예술을 다시 생활로 돌리기 위해 박물관의 벽을 허물려 했다.
그 뒤로도 여러 작가들이 박물관을 뛰쳐나갔다. 가령 작품을 직접 등에 짊어지고 파리의 거리를 활보했던 다니엘 뷔랑. 하지만 기세 좋게 미술관을 떠났던 탕자들은 얼마 뒤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미술관으로 되돌아왔다. 뒤샹의 변기는? 오늘날 그 변기는 전세계 박물관들에서 가장 탐을 내는 아이템이 되었다. 한마디로, 박물관을 조롱했다는 그 이유로 박물관이라는 무덤 속에 박제되어 들어간 것이다.
과연 성공했는가?
평론가 보리스 그로이스에 따르면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현대예술, 특히 팝아트는 마치 박물관에 속하지 않았던 일상의 사물들을 박물관 안으로 들여보냈다. 가령 뒤샹은 변기를, 로셴버그는 침대를, 워홀은 캠벨 깡통을 각각 미술관 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어디 박물관의 벽이 무너지던가? 그것들은 거기서 외려 그 어느 것보다 귀한 작품으로 변용되었다.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예술을 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 말하자면 예술이 다시 “삶과 생생한 관계”를 갖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그것이 예술을 박물관이라는 무덤에서 부활시키는 유일한 길이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예술이 박물관 밖에서 생활이 된 게 아니라, 거꾸로 생활마저 박물관 안에서 예술화한 것이다. 예술가들이 들여보낸 그 일상의 사물들은 죽은 수령의 시체처럼 그 묘지에서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술이 생활이 되나, 생활이 예술이 되나, 어차피 예술과 생활의 경계는 무너진 것이 아닐까?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일상의 대상이 박물관으로 들어와 예술이 되는 현상의 이면에, 그동안 예술에 속했던 것들을 일상의 사물로 되돌리는 반대의 움직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오늘날 고전주의나 바로크나 인상주의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싸구려 장식품, 즉 키치로 여겨진다.
박물관의 벽
결국 문화적 저장고와 일상의 사물 사이의 경계선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 셈이다. 다만 그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몇몇 아이템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질 뿐이다. 박물관의 벽은 이렇게 견고하다. 제도는 어차피 보수적이다. 따라서 박물관은 예술의 무덤이 될 수밖에 없다. 박물관에 걸릴 정도의 작품이면, 이미 제 수명을 다하여 영예롭게 방부처리가 된 파라오의 시체다. 그 시체가 아무리 고귀해도 시체는 시체일 뿐이다.
한편, 우리가 예술을 작품으로 감상하는 문화 자체가 박물관으로 상징되는 예술적 제도에 의존한다. 고려의 청자는 생활에서 떨어져나와 박물관에 전시될 때 비로소 작품으로 감상된다. 이것이 근대적 예술문화다. 얼마나 모순적인 상황인가? 제도는 그 보수성 때문에 진정한 예술의 탄생을 방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작품을 미적으로 향수하는 것은 바로 그 고리타분한 제도 덕분이다.
이제 아도르노의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예술의 재화가 그 안에 비축되며, 그 재화들의 시장가치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앗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즐거움은 박물관의 존재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박물관이 미적 문화의 전제가 되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탈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문제가 풀렸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오늘날 일탈은 더이상 위험하지 않다. 요즘은 박물관에서 외려 일탈을 요구한다. 일탈마저 제도화된 것이다. 이로써 박물관은 다시 무덤이 된다. 그런데 이 무덤은 일체의 부활을 허용하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