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시골의 작은 집으로 이사하며 참으로 많은 물건들을 처분했다. 팔 수 있는 건 최대한 팔고 줄 건 주고 버릴 건 버리고. 사물들의 대량 정리해고를 통해서 좀더 심플하게 살고 싶다는 일생일대의 꿈을 이루보고자 나름대로 피도 눈물도 없이 해치웠다. 그중 최고의 제물은 덩치 큰 가구들(특히 이케아 최우선)이었는데 그 와중에 살아남은 것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재밌다. 대체로 ‘장소의 정갈함’을 위해 꼭 필요하고 보기에도 좋은 것들만 살아남았는데 개중에는 꼭 필요하지 않거나 보기에 좋지 않은, 혹은 둘 다 아닌 것도 있어서 흥미롭다.
먼저 언젠가 장안평 고가구 거리에서 산 100년쯤 된 2단 장식대. 솔직히 정확히 몇살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굉장히 오래된 수제 목가구가 맞긴 맞다. 못이나 나사 혹은 접착제 같은 걸 사용하지 않고 ‘제비추리’라는 하는 우리 고유의 짜맞춤식으로 제작된 한국 전통 가구다. 하지만 도무지 솜씨 좋은 장인의 손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좀 엉성하다. 게다가 다리 부분의 나무가 살짝 쪼개지고 들떠서 보수가 필요한 지경이다. 게다가 그다지 쓸모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1단에는 고작 푸른빛의 찌그러진 사발 하나를 올려놓았고 2단에는 그동안 여행하며 모은 인형들의 작은 무대로 사용되는 정도다. 그럼에도 이 가구가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여백 때문이다. 여백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없다. 침묵이 없으면 음악도 없듯이. 그런데 작은 집에서 여백을 보여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쓸모없이 여백만 많은 고가구와 빈 사발을 통해서라도 슬쩍 여백이 있는 공간인 척 연출하고자 하는 본능적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그다음 꼭 필요하지만 보기 흉하고 더더욱 내 취향이라고 하면 심히 부끄럽기까지 한 MDF 책장은 당분간만 사용할 임시대용이므로 패스. 그렇다면 이제 녹슨 철제 의자에 대해 말할 차례다. 오랜 세월 세탁실 한구석에 찌그러져 너저분한 세탁용품들을 품은 채 거의 버려진 거나 다름없이 살았던 녀석이다. 하지만 이사하는 날, 남편이 “이건 버려도 되지?”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아니, 절대 안돼. 나름 50년대 만들어진 디자이너 가구란 말이야?” 하고 손사래를 쳤던 놈이다. 지금은 그 디자이너 이름도 잊었다. aA 디자인 뮤지엄에서 산 스칸디나비아 아니면 그 인근 나라의 디자이너가 만든 차갑고 딱딱한 철제 의자였는데, 그 느낌이 맥아더 장군이 일본 관료들에게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일본의 항복을 서명받는 데 쓰였던 강철 탁자와 한 세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에서 엉덩이 부분으로 내려오는 곡선이 르누아르의 둔부처럼 아름다운 것이 분위기가 묘했다. 나름 미학적인데, 통속적이지 않은 미학이랄까? 뭐 그런 게 있어서 좋아했는데 그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거다. 역시 살려두길 잘했다. 테라스에 강철 군화 같은 느낌의 철제 의자를 동상처럼 세워두고 거실창을 통해서 그 요염한 둔부 곡선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가 알까? 예전에 만났던 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해준 말이 생각난다. 보잘것없는 재료로 놀랍도록 감각적인 카페 디자인을 해내던 xyz팀의 조연희씨였는데, 이른바 빈티지 명품 디자이너 가구가 고급 소비문화의 아이콘으로 한창 각광받고 있을 때 해준 말이다. “오늘날 좋은 디자인이란 좋은 눈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데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