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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에 안 가요 밴드 연주가 있어서

<우디 앨런: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통해 본 어느 수다스러운 괴짜 희극인의 초상

“내가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지난 몇 십년간 반복해 말해왔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내 영화에서 (나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려 하죠.” 우디 앨런 감독의 뾰로통한 표정이 아른거린다. 실로 영화를 보며 감독 개인에 대한 사사로운 증거를 수집하는 건 몹쓸 일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영화는 작가의 삶이 작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실제 삶과 예술 사이를 분리하는 선은 너무 불분명하고 너무 미세하다”고 우디 앨런도 직접 말한 바 있다. 로버트 B. 웨이드의 <우디 앨런: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는 그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디 앨런이라는 한 인간의 흔적을 훑어내린다. 그중 몇 가지를 뽑아 여기 옮겼다. 그의 오래된 팬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또 돌려봐도 재미있는 어느 희극인의 삶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까웠다.

★ 우디 앨런의 어린 시절.

# 어머니

진행자: 가난을 벗어나려 복싱을 했나요, 아니면 재밌어서? 우디 앨런: 아뇨. 저희 어머니를 상대하려고요. 서로 안 맞는 일이 많았어요. 결판을 내려면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오를 수밖에 없었죠. 전 꼭 어머니의 이를 부러뜨렸어요. 나이 드신 분이잖아요. _<토요일엔 니모와 함께>(1970) 중

1940년대 브루클린 거리에서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뛰놀던 꼬마 앨런 스튜어트 코니스버그. 그는 초라한 2층 건물에 세들어 살 만큼 넉넉지 못한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나 평탄치 못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마틴 코니스버그와 어머니 네티 코니스버그의 관계는 항상 삐걱거렸다. 부모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심술궂고 시큰둥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혹은 <애니홀>의 어린 앨비 싱어처럼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소년의 방어심리였을까. 어쨌든 그로 인해 온갖 난감한 상황이 빚어질 때면 그의 성마른 엄마는 옆에서 보던 그의 친구들마저 벌벌 떨 정도로 그를 세차게 몰아세웠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영화관이라는 도피처가 있었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던 세실리아가 그랬듯, 그도 영화 속의 어느 아름다운 미녀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꿈꿨으리라. 한번은 <백설공주>를 보다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스크린을 만지러 달려나간 적도 있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억지로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지만 현실은 늘 실망스럽고 상처를 남긴다.” 눈부신 햇살보다 퀴퀴한 어둠에 먼저 매혹된 소년은, 그렇게 동네의 극장들을 떠돌았다.

★ 1969년 <투나잇쇼>에서 자니 카슨과 함께.

# 희극과 비극

“인생의 고통, 인간과 그의 존재간의 관계, 고독과 같은 문제들은 결코 해결되지 않아요. 그래서 계속 관심이 가죠. 하지만 전 광대처럼 생각하는 저주에 걸렸어요. 항상 코믹하게 접근하고 말죠. 제가 좀더 재능있는 비극 배우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16살 소년은 이미 자신의 손으로 생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심심풀이로 써젖혔던 농담이 TV쇼와 <뉴요커> 등에 팔리기 시작하며 주급 200달러짜리 직업이 된 것이다. 그러다 찰스 H. 조피와 잭 롤린스라는 매니저를 만났다. 이제는 제작자로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그들은 당시 의기소침한 젊은이를 국민 코미디언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남들 앞에 나서는 일에 낯설었던 그는 매일 밤 무대에 오를 때마다 곤혹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가끔은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에서 몸소 연기한 샌디 베이츠처럼 신에게 묻기도 했을 것이다.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사람들이나 웃기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하지만 막스 브러더스나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같은 코미디 대가들 손에 자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가 공연하는 나이트클럽에 내로라하는 제작자, 코미디언들이 모여들었고, TV쇼 출연 요청도 줄을 이었다. 그러나 희극과 비극 중 하나를 고르라면 그는 언제나 후자를 선망했다. 이후 그가 만든 영화들이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일 때, 거기에는 찰리 채플린이나 페데리코 펠리니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것이다. 특히 펠리니에 대한 오마주는 잉마르 베리만에 대한 오마주와 더불어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배어들게 된다.

★ “방에서 쓸 땐 다 대단해 보여요. …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면 현실이 시작되죠.”

#비관주의

“완성하고 나자 그 영화(<애니홀>)가 전혀 맘에 들지 않았어요. 영화를 보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얘기했죠. 돈 안 받고 영화를 한편 더 만들어주겠다고. 저 영화를 개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요. 제 생각은 그랬어요. ‘내 인생의 이 시점에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라면 그들이 내 영화에 돈을 대선 안된다.’”

늘 코미디를 만들었으나 늘 좀더 진지한 비극을 동경했던 그는 그래서 늘 자신의 영화에 가혹했다. 하지만 그 비관주의가 때로는 그에게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세상은 끔찍한 사람들과 비참한 사람들로 나뉘는데 그나마 비참한 쪽임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그를 지나치게 닮은 어떤 사내도 충고하지 않았던가. 그는 데뷔작 <돈을 갖고 튀어라> 때부터 감독으로서 절대적 자유를 누렸다. 조피와 롤린스가 계약서에 이른바 ‘간섭금지조항’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자유만큼 불안도 컸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행복을 누리기 위해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믿는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불안에의 절대적 수긍이 그로 하여금 대중과 평단의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한 활동을 가능케 했던 것 같다. 그는 찬사에도 혹평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몇몇 신문 기자들이 ‘천재의 작품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천재인 것은 아니거든요. 나를 바보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바보인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인테리어>로 혹평 세례를 맞던 시절도 넘겼다. 그는, 그리고 그를 쏙 빼닮은 그의 주인공들은 그저 인생의 한가운데서 길 잃은 아이처럼 두려워하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들의 적당한 자기 비하와 염세주의가 지난 40여년간 우리를 웃기고, 또 울렸다.

★ <부부 일기>(1992)

#여자

“수업 시간에 글짓기를 하곤 했는데 저는 늘 재미있다고 생각한 걸 썼어요. 한 여자애에 관해 글을 썼고 그 애에 대해 무난한 농담을 했어요. 그 애는 모래시계 몸매이고 그 모래에서 놀고 싶다고요. 선생님들이 그걸 가지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원.”

여자는 그에게 영원한 숙제였다. 이미 알고 있듯이, 최고의 난관은 미아 패로의 시대와 순이 프레빈의 시대가 잠깐 겹쳤던 1992년이었다. 20년 전 그 일로 그는 한동안 대중에게 ‘나쁜 남자’로 낙인찍혔고, 그간 남이 되어버린 아들 로난 패로로부터는 올해 아버지의 날에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아버지의 날을 축하합니다. 아니, 우리 집에서는 매형의 날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와 미아의 시작은 충분히 로맨틱했다. 미아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는 그녀를 여배우로서 다른 어떤 감독보다 사랑했다. “그녀를 나만큼 활용한 감독은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대로 그녀가 앨런의 영화에서 쌓은 연기의 지층은 두터웠다. 특히 앨런은 언젠가 자신에게는 ‘희극적 뮤즈’보다 ‘비극적 뮤즈’가 더 소중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미아는 후자에 속했거나 양쪽 모두를 아울렀다. 그런가 하면 역시 한때 연인이었던 다이앤 키튼은 단연 전자다. 코미디에 관한 한 그들은 환상의 커플이었다. 특히 앨런은 그녀를 통해 여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두 번째 부인 루이스 래서도 그가 흠모했던 여배우다. 비록 함께 작업한 것은 이혼 뒤였지만. 이렇듯 순이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여배우들에게서 사랑을 구했고, 또 영화를 구했다.

★ <환상의 그대>(2010) 촬영현장.

#연출 없는 연출

“배우들이 ‘이렇게 할까요?’ 또는 ‘너무 과한가요?’라고 물으면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 아니다 답을 줘야 돼요. 그럴 땐 치켜세워주면서 ‘아주 좋았어. 계속 그렇게만 해’라고 해요. 그럼 잘해요.”

훌륭한 배우들이 연기하지 않는 연기의 경지를 보여주듯, 우디 앨런도 연출하지 않는 연출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가 배우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고도의 자연스러움과 소진되지 않은 신선함이지 테크닉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배우들을 그냥, 마구, 내버려둔다. 배우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스윗 앤 로다운>에서 재즈 기타리스트 에멧 레이로 분했던 숀 펜은 첫 테이크를 마치고 감독에게 물었다. “귀국편 좌석을 창가, 통로 중 어디로 고를까요? 아니면 계속해도 될까요?” 하지만 앨런은 그저 그를 슬슬 피해다닐 뿐이었다. 심지어 다음 신 촬영을 취소하고 닉스 게임을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환상의 그대>에서 반백수 작가 로이로 등장했던 조시 브롤린은 앨런의 그런 연출 방식 때문에 안달이 나서 “마치 연기학교 학생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 되어 “지옥”을 경험했다. 어쩌면 앨런은 곰의 탈을 쓴 여우 같은 감독이다. 그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해진 배우들이 알아서 쓸개까지 꺼내놓기 때문일까. 그의 영화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배우들이 적지 않다.

★ <와일드 맨 블루스>(1997)

#재즈

“난 (아카데미) 시상식에 안 갈 거야. 밴드 연주가 있어서. 월요일 밤마다 재즈 밴드 연주가 있거든.”

1978년, <애니홀>은 아카데미상 5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고, 그중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핵심만 챙겨 4개 부문을 휩쓸었다. 하지만 앨런을 흥분시킨 건 시상식보다 재즈였다. 그는 매주 월요일에 하던 대로 마이클스 펍에서 그의 뉴올리언스 재즈 밴드와 함께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처음 클라리넷을 잡은 것이 15살, 벌써 60년째다. 그의 필명 ‘우디’도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 우디 허먼에서 따왔다. 딸 베쳇과 맨지도 다 재즈 뮤지션 이름이다. 요즘에는 칼라일 호텔로 옮겨서 연주를 계속하고 있으며, 1996년에는 유럽 투어도 가졌다. <와일드 맨 블루스>라는 다큐멘터리에 당시 그와 밴드의 일거수일투족이 담겨 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한 취향만큼은 누구보다 밝은 그다. 그래서 가끔 어떤 장면을 찍기에 앞서 음악을 먼저 골라놓기도 한다. 짐작했겠지만, <맨하탄>의 저 유명한 오프닝 시퀀스에도 조지 거슈윈의 음악이 먼저 도착했다.

★ <우디 앨런: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2012)

#질병과 죽음

기자: 우디 앨런 감독님께 질문합니다. 영화에 죽음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지금은 죽음에 대해 어떤 입장이신가요? 우디 앨런: 죽음에 대한 제 입장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절대 반대입니다. _2010년 제63회 칸영화제 기자회견 중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질병과 죽음”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들과 맞서지 않을 수 있다면 난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조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거다.” 그의 유혹적인 말재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가분의 관계다. 조용한 우디 앨런을 바라지는 않지만, 그랬더라면 그가 정신분석에 쏟은 37년을 단축시킬 수는 있지 않았을까. 그의 영화에 괜히 프로이트가 자주 인용된 게 아니다. 그의 정신분석의들은 모두 프로이트 계열이었다. 다행히 그는 순이를 만나 정착한 뒤로 정신분석을 그만두었는데, 폐소공포증과 광장공포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의 지인들은 조심스레 그의 평균수명을 105살로 예상했다. 100살까지 산 부친과 96살까지 산 모친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리라는 추측이다. 그가 남은 생 동안 1년에 1편씩 꾸준히 만든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만나지 못한 20여편의 우디 앨런 영화가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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