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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아우, 어쩜 뭐 하나 쉬운 게 없니

SBS 드라마 <신의>,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주인공들의 부딪힘

어린 시절, 길에서 주운 긴 막대기를 홰홰 휘두르다보면 어쩐지 팔도 길어진 것 같고 내 능력도 그만큼 커진 것 같아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렇게 종일 가지고 놀던 막대기는 집에 갈 때가 되면 ‘오늘 놀이는 여기서 끝’이라는 의미로 반 동강을 내거나 괜히 여기저기 후려치다 던져버리는데 어느 날인가는 각목 조각을 학교 철봉에 휘둘렀나보다. 어둑한 하늘에 쩡 하는 소리가 울리며 손에 저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조금 전까지 내 몸과 의지의 연장인 양 휘둘러대던 막대기와 철봉의 물성이, 그리고 예상치 못한 큰소리의 울림으로 인해 빈 운동장의 공간감이 확 끼쳐오는 기분.

코흘리개 시절의 기억을 불러낸 이유는 SBS 드라마 <신의>의 한 장면에서 출발한다. 원나라에서 고려로 향하던 공민왕(류덕환) 일행을 호위하던 무사 최영(이민호)은 기철(유오성) 수하의 습격을 받은 노국공주(박세영)를 살릴 ‘화타의 제자’를 찾아오라는 명을 받는다. ‘하늘문’을 통해 2012년 봉은사로 타임슬립한 최영은 인근의 코엑스를 뒤지던 중, 성형학회 컨퍼런스장에서 발표를 하던 유은수(김희선)를 화타의 제자로 인지하게 된다. 반드시 살려야 하는 사람이 있다, 살릴 수 있느냐, 다그치는 최영에게 상처를 봐야 안다고 어물거리는 은수. 최영은 지체없이 옆에 있던 경비원의 목에 칼을 긋는다. “딱 이런 모양으로 검에 베었습니다. 깊이도 이 정도였고요. 살릴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사람이 현대로 와서 벌이는 해프닝을 문명인의 마음으로 느긋하게 즐길 셈이었는데, 인명에 대한 개념이 전혀 다른 시대에서 칼에 피를 묻히고 살아온 남자가 2012년과 충돌해 빚어내는 위화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물론 사극에서 무사가 사람을 베고 피가 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위화감의 정체는, 비유하자면 철봉과 각목의 물성처럼 각기 단단한 규칙과 설정을 가진 두 장르가 부딪치며 서로의 성질을 드러내는 데 있다.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수다쟁이 푼수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희선과 명령을 따르기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사극의 남자. 둘은 어느 한 세계로 수렴되지 않고 각자의 세계관과 규칙을 따른다. 최영의 손에 의해 고려로 끌려간 은수 역시 좀처럼 무협이 버무려진 사극의 세계관에 순응하지 않는다.

고려가 사극 촬영 세트라고 생각하는 은수가 길가의 백성들에게 강남 코엑스로 가는 길을 묻거나, 노국공주에게 빌려준 키티 손거울 등은 고려 안에서 경쾌한 울림을 만든다. 그러나 잦은 칼부림, 목을 벤다, 어쩐다 하는 위협이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고려의 악인들, 독을 먹고 괴로워하는 아이를 고통없이 보내기 위해 칼로 찌르는 최영의 행동은 은수에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킨다. 분위기에 젖어갈 때쯤 반복되는 파열음. 은수나 최영이 서로 마음을 읽거나 뜻을 같이하는 것 무엇 하나 간단하지 않다. 그런데 은수와 최영 사이만 유별난 것은 아니다. 구차한 설명없이도 자기 뜻과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은 공민왕. 갖고 싶은 사람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일부러 말을 배배 꼬거나 에둘러 말하며 자신이 원하는 답에 도달하길 기대하는 기철. 생각난 것은 바로 말해야 속이 시원하고 넘겨짚기 좋아하는 은수. 틈만 나면 잠을 자고 필요한 말만 하던 최영. 이들은 충돌을 거듭하며 각자의 내면이 어떤 성질과 윤곽을 지녔는지 드러내고 비로소 매력이 발생한다.

극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느라 종종 캐릭터의 내면을 뭉개버리는 드라마에 질렸다면, 때론 우직하다 싶을 정도로 극에 벌여놓은 인간 하나하나를 쉽게 다루지 않으려는 송지나 작가의 집념을 만나도 좋겠다. 아우, 여긴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그래서 좋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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