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10층 시사 교양국 한구석에는 ‘<PD수첩> 작가방’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층침대 두개가 좁은 방을 꽉 채우고, 얇은 간이벽 너머로 사무실 소음이 귓가를 울렸지만 작가들을 위한 수면실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들떴다. 촬영 테이프 컨버팅을 기다리거나, 외국 자료 번역을 맡겨놓았거나, 인터뷰 녹취를 풀거나, 나를 비롯한 1, 2년차 막내작가들이 집에 가길 포기하고 회사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날은 적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잘 곳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잠시 눈 붙일 곳, 등 펴고 누울 곳이 없었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여직원 수면실의 폭신한 침대에서 새벽 쪽잠이라도 잘 수 있는 날은 드물게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동기가 잠긴 수면실 문을 두드리자 새벽 뉴스를 기다리며 자고 있던 아나운서가 달려나와 한참 싫은 소리를 해댔을 때, 나는 복도 문 뒤에 숨어 있었다. 프리랜서, 작가들의 직원 수면실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은 게 그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8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래서 가끔은 편집실 의자를 붙여놓고, 혹은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도 잤다. PD들이 거의 퇴근한 시간에는 창문 옆 온풍기가 나오는 난방기 위에 잠깐 눕기도 했다. 등은 뜨겁고 코는 시렸다. 지금 생각하면 택시로 집 몇번 오갈걸,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지만 100만원을 조금 넘는 월급은 늘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그나마 ‘본사’ 작가인 우리의 월급이 ‘업계 최고’ 수준이었는데도, 자취방 월세까지 내야 하는 동기들은 나보다 훨씬 빠듯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갔다. 10년차 작가가 되어도 마음껏 택시를 탈 수 있는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 프리랜서지 실은 24시간 대기조에 가깝게 프로그램에 매여 있으면서도 시사교양 작가의 월급은 턱없이 적었다. 일 잘하기로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메인작가 선배들은 수개월 동안 60분짜리 한편을 만들고 목돈을 받았지만 그마저도 개월 수와 노동 시간을 따져보면 슬픈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에겐, 혹은 내겐 존경스런 롤 모델이 있었다. 막내에서 짧은 꼭지 원고를 쓰는 서브작가가 되고, 프로그램 전체를 구성하는 메인작가가 되고, 그중 ‘일 잘하는 작가’들만 한다는 <PD수첩> 작가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 명예로운 일은 없었다. 그러나 <PD수첩>에서 6개월 이상 버틴 막내들은 어딜 가도 일을 잘한다는 얘기가 돌 만큼 업무 강도는 무시무시했다. ‘우리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라는 슬로건을 지키기 위해 <PD수첩> 작가들은 항상 논문을 쓰는 사람처럼 공부하고 빚 받으러 다니는 사람처럼 섭외에 매달렸다. 거대한 권력에 저항하고 잔혹한 범죄를 파헤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지독히도 지난하고 팍팍한 과정이었다. 막내 가운데 일 못하기로는 으뜸갔을 내가 <PD수첩> 문턱도 못 밟아보고 방송 일을 그만둔 이후에도 <PD수첩>에서 일하던 한 친구는 약자에게 자행된 폭력에 대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알리기 위해 집요하게 ‘증언’을 따내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토로했다. 가슴이 턱 막혔다. 세상의 무수한 부조리와 비극에 직면하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직업이자 일상인 사람들이라니, 쥐꼬리만 한 월급과 손바닥만 한 수면실이 그들이 얻은 전부였는데도.
그런데 ‘그 짓’을 12년이나 해온 선배가 있었다. 지난 7월, MBC 파업 종료 직후 해고된 정재홍 작가다. 그를 포함해 메인작가 여섯명 전원이 <PD수첩>으로부터 잘려나갔다. 국장은 “분위기 쇄신 차원”이라고 말했다지만 일을 가장 열심히, 잘, ‘징하게’ 하는 사람들을 내쫓은 데 대한 변명치고는 빈약하다 못해 추접스러웠다. 대체작가를 구한다는 사쪽의 발표에 920명의 시사교양 작가들은 <PD수첩>에 대한 보이콧으로 화답했다. 그래서 파업은 끝났지만 <PD수첩>은 1월17일 방송 이후 멈춰 있다. 김재철 사장 이하 ‘그분’들의 바람은 이대로 <PD수첩>이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일 테다. 언제나 ‘본’ 것에 대해 써왔던 이 코너에, 처음으로 ‘볼 수 없는’ 프로그램에 대해 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