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앙드레 브르통은 야전병원에서 복무하던 중 한 병사를 알게 된다. 이 사내는 전쟁이 현실이 아니라 세트장 안에서 벌어지는 허구라 굳게 믿었다. 사내는 적의 포격이 시작되면 외려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데도 그의 몸에는 파편 하나 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 전쟁은 허구’라는 병사의 확신을 더 깊게 해주었다고 한다.
브르통의 사적 유물론
이렇게 미쳐버리기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 병사는 아마도 벌써 쇼크로 사망했을 것이다. 그가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로 도피한 것은, 결국 전쟁의 과도한 충격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가 정치와 만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여기서 ‘광기’는 문명의 부정적 상태의 ‘징후’이자, 동시에 그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라는 예술운동은 이로써 동시에 공산주의라는 정치운동이 된다.
브르통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문명의 스트레스, 특히 자본주의 문명의 억압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이다. 자본주의는 살아 있는 것까지도 화폐가치로 환원하여 물화(物化)시켜 버린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거대한 죽음(mortification)의 문명이다. 게다가 세계대전을 통해 브르통은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새로운 것의 건설이 아니라, 외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의 ‘파괴’, 나아가 인간 자신의 ‘살상’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브르통은 그 넋이 나간 병사의 ‘광기’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보았다. 잠수함의 토끼랄까? 광인의 ’광기‘는 사회의 파멸적 상황의 정직한 증언이자, 그 상황에서도 삶을 유지하려는 처절한 의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광기를 통해 죽음의 문명인 자본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브르통은 초현실주의가 공산주의 운동과 궤를 같이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그대로 초현실주의의 강령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 때문이다. 프로이트로 채색된 사적 유물론이랄까?
바타유의 기저 유물론
하지만 바타유는 브르통의 ‘사적 유물론’이 아직 유미주의와 이상주의 신학에 갇혀 있다고 보았다. 가령 브르통이 부르주아 사회를 해체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폐허 위에서 새로이 뭔가(가령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는 이렇게 ‘위로 상승하는 형성의 충동’, 즉 물질이라는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형식을 쌓아올리려는 ‘에로스의 충동’이었다(예술적으로도 초현실주의는 다다와 달리 그 자체가 하나의 확립된 ‘양식’이었다).
반면, 바타유에게 초현실주의는 ‘형성’이 아니라 ‘해체’의 충동을 의미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폐허의 이미지에 끌린 것은, 그 위에 뭔가를 구축하려는 욕망에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폐허 그 자체에 매료됐다는 것이다. 결국 브르통과 바타유의 차이는, 초기 프로이트(‘에로스의 충동’)와 후기 프로이트(‘타나토스의 충동’)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바타유에게 초현실주의는 죽음의 상태, 즉 형태가 없는(formless) 물질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의미했다.
바타유는 초현실주의가 존재의 바닥(base)으로, 말하자면 일체의 위계(hierarchy)나 분절(articulation)이 없는 무정형한 물질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브르통의 ‘사적 유물론’과 대립되는 바타유의 ‘기저 유물론’(base materialism)이다. 물론 브르통은 이런 유형의 유물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경우 초현실주의는 더이상 죽음에 저항하는 해방운동이 아니라, 졸지에 죽음을 지향하는 변태성욕(?)이 되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를 바라보는 이 두 시각은 동시에 ‘모더니즘’ 예술을 해석하는 두 방식이기도 하다. 가령 잭슨 폴록을 예로 들어보자. 1940년대에 미국 회화는 아직 유럽의 회화, 특히 초현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들이 받아들인 초현실주의는 물론 브르통의 것이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자동기술법’(automatism)- 의식의 검열을 피해 머리에 떠오른 문장을 생각할 겨를 없이 즉각적으로 받아 적는 기법- 과 동일시했다.
폴록 역시 마더웰과 같은 다른 미국 화가들처럼 한때 이 자동기술법의 실험에 몰두한 바 있다. 사실 폴록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보면, 이 문학의 기법을 그대로 회화에 도입한 것처럼 보인다. 아무 밑그림 없이 곧바로 화폭으로 다가가, 즉흥적이고 즉발적인 방식으로 화면에 물감을 뿌려대는 폴록의 화법은 앙드레 마송의 자동드로잉(automatic drawing)을 빼닮았다. 마송의 드로잉처럼 폴록의 회화도 면(面)이 아니라 물감의 선(線)으로 이루어진다.
브르통의 시각에서 볼 경우, 폴록의 그림은 ‘즉각적이고 즉발적인 화법으로 미술사의 전통, 관습, 규범 등 의식의 간섭을 배제할 때에 떠오르는 순수한 무의식의 이미지’로 해석될 것이다. 실제로 폴록은 “내 그림의 원천은 무의식에 있으며”, “그림을 그릴 때에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무의식적 이미지는 그저 낡은 예술의 해체에 불과한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예술의 형성일 것이다.
잭슨 폴록을 해석함
초현실주의의 본질이 ‘죽음의 충동’에 있다면, 폴록에 대해 이와는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평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무정형>(Formless)이라는 책에서 이제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새로운 측면을 지적한다. 말하자면 폴록이 그림을 그릴 때 화면에 못, 버튼, 모래, 티켓 등 쓰레기 같은 재료들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그의 그림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 무언가의 ‘형상’(Gestalt)이 아니라 아예 그 자체가 ‘물질’(material)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폴록의 화면에는 형태도 없고, 형태와 배경의 구별도 없고, 선과 면의 구별도 없다. 보통의 그림은 액자를 통해 화면과 벽면이 분명히 구별되나, 거대한 벽지를 연상시키는 폴록의 그림에서는 작품의 안과 밖의 구별도 희미해진다. 일체의 분절이 사라진 셈이다. 고급한 예술적 재료와 비천한 일상의 물질 사이의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폴록의 그림은 일체의 위엄(dignity)을 버리고 무정형의 물질로 돌아가려 한다.
한마디로, 폴록의 작품은 기존의 회화 언어를 해체하고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형상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아예 형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아무런 분절도, 아무런 위계도, 그리하여 아무런 형식도 없는 순수한 물질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의 산물이다. 폴록의 작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브르통이 직감은 했으나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던 충동, 그리하여 바타유만이 수미일관 주장했던 충동, 말하자면 ‘죽음의 충동’이다. 여기서 폴록은 갑자기 ‘앵포르멜’(Informel)에 가까워진다.
장 뒤뷔페 역시 화면을 ‘반죽’이나 ‘대변’에 가까운 임파스토(=두꺼운 물감)로 처리했다. 여기서 우리는 무정형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을 엿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작가가 공유했던 분변적(scatological) 취향이다. 폴록은 자신의 몇몇 작품에 소변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고, 뒤뷔페는 언젠가 자신의 작품에 쇠똥을 사용하기를 기대했다. 인간에서 동물로, 수직에서 수평으로, 형태에서 물질로 퇴행하려는 욕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