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일을 잘 기억하는 사람들을 보면 놀라울 때가 많다. 도대체 그들의 뇌는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그토록 사소한 일들을 기억해낼 수 있는가. 불가사의하다. 그들의 뇌에는 커다란 서랍장이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랍장 안에는 연도별로 분류된 서류 봉투가 들어 있고, 서류 봉투 속에는 월별 사건일지 파일이 들어 있고, 파일 앞에는 중요한 키워드가 적혀 있을 것 같다. “1997년에 넌 뭘 했어?”라고 누군가 물어오면, 뇌 속의 로봇손이 ‘위이이잉’ 하고 움직이며 서랍을 열고 봉투 속에 있는 파일을 집어와서 읽어주는 것이다(음, 너무 복잡한가?).
드라마(라고 해야 하나, 시트콤이라고 해야 하나) <응답하라 1997>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드라마 속에다 1997년 즈음의 일상을 오밀조밀하고 철두철미하게 복원해놓았(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그게 얼마나 싱크로율이 높은지 알지 못한다. “아, 맞아, 저게 1997년에 나왔지”라는 건 전혀 알지 못하고 “아, 옛날엔 저런 게 있었지” 정도까지만 알 뿐이다. 윤제(서인국)가 노래방에서 부르는 사준의 <Memories>도 그즈음 히트한 곡이었던가, <이나중 탁구부>가 저때 (나는 한참 뒤에 보았다) 유행했던가. 1997년이 제목에 들어가고, 1997년의 많은 문화가 드라마 속에 숨어 있지만 1997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가 폭발한 시기이고, IMF가 터진 해이고, 커다란 변화가 시작된 해이긴 하지만 1997년은 일종의 상징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삶의 경계선이 되는 해, 평생 잊지 못하는 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기분으로 보내는 해가 있다. 윤제와 시원(정은지)에게는 그게 1997년이었을 것이고, 나에게는 1989년이었다. 1989년이라고 하니 벌써 아득해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의 순간, 대학에 들어가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선배들을 쫓아다녔던 순간, 나라는 어수선하고 내 마음도 어수선했던 순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데 누굴 사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순간, 문득 내가 어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던 순간,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면 스스로가 아이처럼 느껴졌던 순간, 그 모든 시간들이 1989년에 있었다. 다른 과거는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1989년만큼은 잘 기억난다. 그해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 모든 일들이 한해 동안 일어난 걸까 싶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응답하라 1997>을 보면서 마음이 짠한 것도 윤제와 시원이가 그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우리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을까. 과거의 우리가 응답할 수 있다면 미래의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1989년에 나가 있는 20살 김중혁 통신원, 응답하세요.” “네, 잘 들립니다. 42살 김중혁씨, 2012년에 저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나요?” “음, 음, 뭐랄까, 그러니까.” “별로인가 보네요.” “아니에요. 제법 잘 늙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거긴 어때요? 스무살, 힘들죠?” “여기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우리 힘내요.”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