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하루 전날 태풍 때문에 일정이 꼬여 할 수 없이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전망 좋은 펜션이나 유스호스텔에 갈까도 생각했지만 식사문제도 그렇고 시간도 늦고 만사가 너무 귀찮고 피곤했다. 아무 여관이나 가지 뭐, 대충 하룻밤만 자면 끝인데. 무슨 ‘킹왕짱’ 러브호텔을 찾는 것도 아니고. 군청 근처에 도착해 그냥 제일 크고 무난해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사실 낯선 곳에서 잘 곳을 잡는다는 건, 모텔 마니아가 아닌 다음에야 그날의 운발이 크게 작용한다. 근데 프런트 정면을 보니, 오호 여긴 각 객실의 내부 사진이 걸려 있어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 그렇다고 강남의 무슨 테마룸 같은 건 아니고 그냥 흉내 정도? 그래도 지방 소도시에 이 정도 수준의 시설과 착한 가격이면 훌륭하지 싶어 피로도 풀 겸 밀린 때도 불릴 겸 해서 커다란 월풀이 객실 내부에 턱 하니 설치된 방을 골랐다. 벽지 모양이 요란한 것 빼곤 나름 괜찮았다. 초행길치고는 선방인 셈이다.
생각해보면 모텔이란 게 가격은 거기서 거긴데 각종 편의시설이나 공간의 크기와 분위기, 동선의 용의주도함은 정말 천차만별이다. 딱 보기엔 괜찮다 싶어도 뒤늦게 사람을 웃겨버리는 여관이 있는가 하면 정말 코믹하고 어이없는 최악의 모텔도 있다.
얼마 전 일이다. 그날도 일이 있어 지방에 내려갔다 밤이 되어 여관이나 모텔을 찾아보니 이 동네엔 딱 세 군데. 망설이고 망설이다 그래도 제법 호젓한 강가 옆이 낫지 싶어 그곳을 잡았더니 웬걸, 방은 좁고 욕실은 을씨년스럽고 왠지 삭막한 기운이 철철. 그냥 나갈까 하다가 그러기엔 밤은 깊고 몸은 천근만근이라 대충 자기로 했다. 그게 실수였다. 뜨거운 물은 찔끔찔끔 나오고 벽 여기저기는 땜질투성이인 데다가 문도 잘 안 닫힌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랑 생수병 하나 있는데 그것도 재활용. 심지어 한밤중의 강물 소리가 얼마나 웅장하고 시끄럽던지. 게다가 큰 도로 옆이라 밤새도록 들려오는 차 소리까지. 정말 우울한 밤이었다. 제기랄, 그냥 시장 한복판에 있던 하성장인가 뭔가 하는 여관에 갈걸. 괜히 겉모양과 리버사이드 모텔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에 속아 이런 개고생을 하는구나 싶었다. 간판 밑에 쓰인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라는 글자를 이를 갈며 노려보다 도망치듯 모텔을 빠져나온 기억이 있다. 그야말로 형벌의 리버사이드였다.
그 이후 아무리 나쁜 모텔에 가더라도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꼭 챙겨가는 게 있다. 질 좋은 에센셜 오일(얼마 전 버락 오바마 커플이 즐겨 쓴다는 향을 선물받았는데 발향이 고급스럽고 강한 것이 정말 좋았다)과 집에서 만든 소이 왁스 양초. 미처 챙기지 못했을 땐 인근 편의점에서 싸구려 초라도 사다 켠다. 때로는 포터블 턴테이블과 좋아하는 LP 몇장, 집에서 마시던 간단한 핸드드립 커피기구와 원두까지 챙기곤 하는데, 그럼 확실히 낫다. 아무리 누추해도 나름대로 편안한 운치를 느낄 수 있으니까. 참, 좋은 모텔과 나쁜 모텔에 대해선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데 이상한 모텔은 아직 못 가봤다. 러브 체어나 물침대 같은 에로틱하고도 수상쩍은 물건들이 있는 모텔 말이다. 모텔 유저로서 그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도 한번쯤 가볼까 싶다. 또 아나? 그 희한한 경험이 지루한 일상에 한 줄기 광명의 빛이 되어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