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 CJ문화재단의 ‘Project S’ 지원작 선정을 위한 면접 심사장. 심사위원들은 평범한 한 대학생에게 눈길이 쏠렸다. 카메라를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는 힙합 키드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했고, 심사위원들은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랩을 한번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한때 힙합 키드였으나 지금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청년이라. 연출자의 이력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기획안 자체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심사위원들의 짓궂은 질문 앞에서 평범한 외모의 수줍음 많은 청년이 끝내 주저했다면, <투 올드 힙합 키드>(9월13일 개봉)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만든 다큐멘터리로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 및 우수작품상을,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관객상까지 차지한 정대건(26) 감독. “눈빛은 음흉하지만 힙합을 굉장히 긍휼히 여기던 대한의 건아”는 어찌하여 ‘영화’라는 새로운 꿈을 품게 된 것일까. ‘투 올드 시네마 키드’로 변신한 정대건 감독의 지난 10년을 들었다.
-홍대쪽은 자주 오나. =주인공들이 다 여기 산다. 주말마다 공연하고. 어울리려면 홍대로 와야지.
-요즘도 놀이터에서 랩 하고 노나. =뜸해지긴 했다. 그래도 불시에 ‘땡기면’ 만나서 한다. 주로 저녁에. 어린 친구들도 많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나. =거리에서 랩 하는 문화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붐 박스 들고 다니면서 음악 틀고 놀지만, 그때는 다 노래방에 갔다. 유명한 힙합 노래 반주 삼아서 프리스타일 랩 하고 노는 식이었다. ‘정모’하는 날엔 이대 지하철역 2번 출구에서 모여서 신촌에 있는 노래방에 주로 갔다.
-용돈을 노래방에 다 쏟아부었겠다. =정모 회비가 5천원 정도였는데 못 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럴 때는 리더 격이었던 대학생 형이 회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한 힙합 사이트를 통해서 인연이 시작됐다고 했는데. =당시 김진표씨가 개인 홈페이지에 ‘래퍼 모여’라는 게시판을 운영했다. 힙합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 그 게시판을 들락거렸다. 거기에 가사 올리고, 서로 채팅도 하고. TRF(The Real Flavor)도 다 ‘래퍼 모여’에서 알게 됐다.
-TRF라는 크루(crew)는 노원 지역 힙합 키드들이 모여 만들었다. 학교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다 노원 일대에 살았는데 나 혼자만 일산에 살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들어갔다. 나보다는 다 한두살 많은 형들이었다. 또래지만 그래도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까 친하게 어울리진 못했다. 말없이 그들을 관찰했던 버릇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아닌가 싶다.
-가장 멋진 형이 누구였나. =허클베리 피(박상혁)가 가장 눈에 띄었다. 고등학생이었는데 워낙 잘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우리 사이에선 이미 우상이었다. 영화에도 나오는 지훈 형이 몇번이나 같이 하자고 해서 TRF에 들어갔는데, 허클베리 피처럼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싹수가 보이는 형들이 몇 있었다.
-힙합에는 어떻게 빠져들었나. =조PD가 나왔던 1999, 2000년 무렵이었다. 드렁큰 타이거, CB Mass 등이 앨범을 처음 낸 시절이기도 하다. 가리온도 언더그라운드에서 유명했다. 힙합 붐이 조성된 거지. 그때 만난 친구들이 아마 힙합 키드 1세대가 아닐까.
-지조(민주홍)는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를 훔쳤다고 자백(?)한다. =마이크 살 돈이 없으니까 일단 ‘뽀린’ 거지. 녹음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마이크부터 훔쳤다고 했다. 잭이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고. (웃음)
-할당량이 있었던 건 아닌가. (웃음) =그 정도로 많이 훔치진 않았을 거다. 나야 한번도 그런 적이 없지만.
-처음부터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찍을 생각이었나. =점점 늘어난 거다. 영화 공부하겠다고 조그만 캠코더를 하나 샀고, 얼마 뒤 지조 형의 데뷔 앨범 준비 과정을 찍게 됐다. 그러던 차에 지훈 형과 연락이 닿았는데 예상과 달리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라고 했다. 영화로 만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림이 조금씩 그려지면서 예전의 형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다. 회계사 하는 현우 형은 처음 만났을 때 기억을 잘 못하더라. 그래서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꼬마가 나라고 일러줬다. 우리 사연을 찍겠다고 했더니 다들 흔쾌히 받아줬다.
-함께 찍은 사진들이 초반부에 굉장히 많이 나온다. =힙합 하던 친구들에겐 단체사진이 하나의 문화였다.
-2005년 한 클럽에서 열린 랩 배틀대회 때는 사자머리를 하고 있던데. =군대 갔다오면 그런 머리 못할 것 같아서. 홍대의 어느 미용실에 가서 호일 파마를 했다.
-그랬던 힙합 키드가 어느 날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는데 다들 놀라지 않던가. 거부감을 보인 이들은 없었나. =다큐멘터리를 완성해서 상영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싶다.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이제 막 캠코더를 산 때였으니까. 지조 형도 내가 찍은 영상 쪼가리를 앨범 홍보용으로 쓰려고 했던 것 같다. (웃음)
-자전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군에 갔다온 다음 복학해서 오랜만에 홍대쪽에 간 적이 있다. 허클베리 피를 만났는데 요즘에 뭐하고 사냐면서 ‘앨범 내야지’ 그러더라. 찔려서 그 뒤론 홍대에도 잘 안 가게 됐다. 자격지심 때문에 형들을 멀리한 셈인데, 결국 그 자격지심 때문에 영화를 찍게 됐다. 형들이 성과를 내고 그러는 걸 볼 때마다 부끄러웠다. 내 삶에서 힙합은 이제 멀어졌으니까.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랩 하겠다는 꿈을 번번이 유예시킨 건 다름 아닌 바로 나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형들은 어때?’라고 질문을 한번 던져보고 싶었다.
-영화에서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원래는 나를 끼워넣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되돌아온 질문에 답하면서 나도 캐릭터가 있구나 싶었다. 주거니 받거니 랩 하는 것처럼, 질문을 던지고 받고 그러면서 진짜 고민을 하게 됐다. 내 삶을 좀 정리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괴팍하고, 외롭고, 힘들고, 배고프고”, 영화는 사고(四苦)의 길이라고 일갈하는 어머니의 독설을 중간중간 배치했는데. =나 역시 주인공의 한명으로 담기로 맘먹으면서 어머니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 고민을 내레이션으로 푸는 건 너무 추상적이었고, 어머니와의 갈등이 실제로 내 고민 중 하나였으니까. 어머니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보고 “니 꼴리는 대로 살라”고 했다면 지금처럼 많이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최고은 작가의 죽음 소식을 접하신 뒤엔 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셨다.
-힙합을 놓지 않은 형들과 생활을 택한 형들을 찍을 때의 감정은 달랐을 것 같다. =처음 공연 촬영 때는 불편했다. 형들의 노래를 다 아니까 찍으면서 저절로 따라 부르게 되더라. 그러면서 ‘아, 이제 나는 랩 하는 사람이 아니라 랩 찍는 사람이구나’ 하고 인정하게 됐다.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무대를 간접경험하는 기분도 들었고. 반면, 랩을 그만둔 형들에게는 심하게 감정이입이 됐다.
-특별한 음악과 평범한 삶의 대비는 후반부로 가면 허물어진다. “내겐 음악이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이 특별하다”는 JJK(고정현)의 대사처럼. =행복하지만 불안하고, 불행하지만 안정적인. 이런 식의 이분법으로 인물들을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중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층위의 인물들을 가져왔다. 촬영하면서 알게 된 DJ 샤이닝 스톤 같은 인물도 그래서 주요 캐릭터로 만들었다. 샤이닝 스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서 말해주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랩이든 영화든 무책임한 짓이라고 일갈하는 지훈은 어느 순간 공무원이 돼서도 랩을 하겠다고 말한다. 마음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중간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지훈 형은 자존심이 굉장히 세다. 같이 어울렸던 형들은 지훈 형이 이제 음악을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미련이 남아서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고. 촬영하면서 왜 그렇게 괴로워하냐, 음악을 안 하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뭐 이런 식으로 주제넘게 충고했던 적도 있다. 지훈 형 입장에선 자신이 음악을 영영 놓아버린 사람처럼 오인받기 싫어서 나중에 카메라 앞에서 속마음을 털어놨다.
-다큐멘터리에 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유년의 기억이 있을 텐데. =멤버 중에 군대에서 사고로 먼저 하늘로 간 형이 있다. 2005년에 그 형의 추모공연을 지인들끼리 모여서 한 적이 있는데 그때가 맨 먼저 떠오른다. 허클베리 피가 군 시절 외박 나와서 여자친구도 안 만나고 우리와 함께 밤새 랩 하고 놀다 아침에 복귀한 날의 기억도 강렬하다.
-청소부 아저씨가 등장하는 인서트 컷이 인상적이었다. 아저씨가 모는 리어카 앞쪽에 CD가 잔뜩 붙어 있는 것 같던데. =정말? 난 몰랐다. 현우 형 출근길을 찍은 다음에 촬영한 장면일 텐데. 다시 한번 봐야겠다. (웃음)
-투게더 브라더스의 쇼케이스 날, <투 올드 힙합 키드> 가사를 직접 만들어 불렀다. =이렇게까지 내가 손을 놨구나 싶더라. 공개하는 것이 망설여지고 또 민망했다. 다큐멘터리의 마무리를 위해서 딱 눈 감고 했다. (웃음)
-다음 프로젝트는 구상했나. =일단 영화를 배울 수 있는 학교에 가고 싶다. 이번 작업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식하게 찍었다. 촬영인원이 몇 명이 필요한지도 몰랐고. 무턱대고 혼자 덤볐는데 서러운 적이 많았다.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물어볼 곳이 없어서 인터넷 게시판에 질문 올리고 답을 기다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베르너 헤어초크처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나누지 않고, 양쪽을 넘나들면서 작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