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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뜨겁구나, 뜨거워!

<아내의 유혹> 김순옥 작가의 귀환, SBS 주말극 <다섯손가락>

부의 규모를 속물의 시선으로 훑는 장면을 좋아한다. 땅이 몇 에이커에 고용인은 몇명이고 손님용 식기의 벌 수, 여주인의 옷차림에 관해 집착하는 이야기.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엔 유독 저택이 불에 타들어가는 설정이 잦더라. 계급 몰락에 관한 은유 따윈 접어두고라도 충실하게 쌓아올린 설정들이 잿더미로 돌아가는 장관에는 도리없이 매혹되고 만다. 그리고 여기 시작부터 활활 타오르는 저택이 있다.

두대의 피아노를 맞물려놓고 동생과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주거니 받거니 연주하는 아름다운 청년 지호(주지훈). 조금 전까지 리스트에 취해 있던 그는 어느새 화염에 휩싸인 저택에서 비명을 지르는 새어머니 영랑(채시라)을 얼음 같은 눈으로 바라본다. 배다른 형제를 거느린 아름다운 어머니의 비틀린 모정. 독선적인 남편의 왜곡된 사랑으로 자식대까지 얽혀버린 운명의 실타래. SBS 주말극 <다섯손가락>은 <아내의 유혹> 김순옥 작가의 작품답게 전개속도가 빠르며 최영훈 PD와 이길복 촬영감독의 조합으로 전에 없던 영상미까지 얻었다. 80년대 미국 통속극의 향수에 국산 고부갈등을 심고 재벌가의 경영권 다툼, 천재와 범재 음악가의 갈등을 버무렸으니… 응당 넋을 놓고 투항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웬걸, 이 드라마 상당히 웃긴다!

잠시 드라마 속 부의 묘사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MBC <로열패밀리>는 넓은 사유지 위에 서열대로 지어놓은 독채건물과 내부에 다양한 용도의 비밀스런 공간들을 배치해 부의 규모를 짐작게 했다. SBS <천일의 약속>에서 고가의 미술품을 구매하거나 명품 선물도 거리낌없는 이미숙이 화장대에 앉아 (역시 고가임에 분명한) 시트 마스크 포장지의 남은 유액을 손가락으로 걷어내 손등에 바르는 장면은 비싼 물건을 진짜처럼 쓰는 현실감을 부여한다. 이런 것들이 충실하면 그 위에 놓인 부자 캐릭터의 설득도 용이한 법.

<다섯손가락>의 부성악기 오너 유만세(조민기)의 집은 ‘헬퍼가 다섯’이다. 초등 4학년 아들의 목욕장면에선 영랑을 돕는 한 사람 외에 굳이 갈아입힐 옷가지를 들고 서 있는 사람과 빈손으로 서 있는 이까지 헬퍼 셋이 소요된다.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전시적인 풍경이라 사람 부릴 줄 모르는 여주인의 허영처럼 보인다. 채시라 포스라면 금은방 일력을 벽에 걸어놔도 능히 재벌집 안주인을 연기할 텐데.

한편 만세는 아내에게 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하고 완벽한, 어떤 갑부도 흉내낼 수 없는 명품 피아노’ 제작을 지시한다. 세계적인 장인 수십명을 불러모아 만들었다는 피아노를 앞에 둔 실무진의 설명은 ‘보시는 대로 최상품 원목에 다른 피아노에선 시도할 수없는 최고가의 부품만을 사용’했단다. 봐도 모르겠고 들어도 모르겠다.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는 김성모 화백마냥 어물쩍 넘어간다. 상속을 빌미로 아이들을 쥐고 흔드는 만세의 언행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피아노 좀 재능있다고 부성악기를 맡길 순 없어”와 “일단 피아노부터 가르쳐보고 좀더 재능있는 아이에게 우리 부성악기만의 제작비법을 전수할 생각입니다”는 같은 회의 대사다. 부성악기가 주최한 콩쿠르 심사위원의 음악관 역시 난감하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정신이야말로 음악인이 추구하는 가치 아닌가요?” …체육인이겠지.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만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타인에게 베푼 선행조차 죄없는 희생으로 돌아오는 <다섯손가락>의 세계는 앞으로도 많은 비밀과 촘촘한 원한관계의 물량공세가 예상되는 바. 첫 장면에서 품은 기대는 접었으나 한 개비 한 개비가 불씨이자 땔감이 되는, 성냥으로 쌓은 탑을 닮은 이 드라마, 화력만큼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