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2월 앤디 워홀은 새로운 연작의 제작에 들어간다. <산화 회화>(Oxidation Painting, 1977~78)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들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워홀은 먼저 캔버스의 표면에 금속성 염료를 칠한 뒤, 몇몇 친구들을 초청하여 그 위에 오줌을 누게 만들었다. 오줌의 산성이 염료 속의 구리 성분을 산화시키면, 캔버스에는 기묘한 무늬가 발생하게 된다. 출생은 비천해도, 효과는 고상하다. 마치 한폭의 선화(禪畵)를 보는 듯하다.
잭슨 폴록과 앤디 워홀
워홀의 이 소변 회화(piss painting)는 물론 폴록의 패러디로 보인다. 워홀은 아마 폴록의 전기를 통해 그가 공공장소에서 오줌을 누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폴록의 후원자였던 페기 구겐하임이 직접 목격한 것이리라.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어느 날 자신이 주최한 파티에서 폴록이 술에 취한 채 벽난로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하지만 파티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좀더 진지한 의미에서 폴록의 패러디이기도 했다. 폴록은 붓이나 막대기에 공업용 에나멜을 찍어 화폭에 뿌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을 사용했다. 막대기로 물감을 찍어 화면에 질질 흘리는 것이나, 캔버스를 바닥에 깔아놓고 그 위에 오줌을 누는 것이나, 그림을 그리는 데에 중력을 이용해 유체를 낙하시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워홀의 것은 폴록의 즉흥적/자발적 창작의 분변학적(scatological) 변주라 할 수 있다.
다른 점은 성 정체성이다. 이성애자였던 폴록과 달리 워홀은 동성애자였다. 폴록의 방뇨 습관에는 성적 뉘앙스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워홀의 소변 회화에는 다른 남성의 방뇨장면을 훔쳐보는 호모에로틱한 관음증이 느껴진다. 왜 폴록의 드리핑을 하필 방뇨의 형태로 패러디하려 했을까? 혹시 폴록의 딱딱하게 굳은 붓끝에서 물감이 줄줄 흐르는 모습이 발기한 성기의 끝에서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연상시킨 것일까?
미술사에서 오줌과 관련된 최초의 작품은 뒤샹의 <샘>(1915)일 것이다. 소변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예술의 세계에 소변기를 들여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갖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몇년 전 프랑스의 한 작가가 거기에 소변을 보려다가 경비원에게 제지당한 바 있다. 사지가 들린 채 억지로 끌려나가며 작가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뒤샹이 살아 있다면, 내 프로젝트에 찬성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뒤샹이라면 그 일을 허락했을 거다.
1958년 4월 파리에서는 이브 클라인의 전시회가 열렸다. <공>(空)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전시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휑하니 빈 전시장을 둘러보는 사이에 관객은 이브 클라인이 나눠준 칵테일을 마셨다. 진+토닉+쿠앵트로(오렌지 술). 거기에 클라인은 슬쩍 메틸렌 블루를 섞었다. 칵테일을 마신 관객은 나중에 소변을 보며 놀랐을 것이다. 물론 ‘클라인 블루’만큼 진하지는 않았지만, 소변이 푸르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1962년 백남준은 뒤셀도르프에서 ‘플럭서스 챔피언 콘테스트’를 개최했다. 경연의 규칙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오줌을 누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 참가자들이 버킷에 소변을 보는 사이, 백남준은 옆에서 스톱워치를 들고 시간을 측정했다. 우승자는 어느 미국인, 공식기록은 59.7초였다. 올림픽 경기와 마찬가지로 우승자에게는 그가 속한 나라의 국가를 불러주었다. 백남준은 이 작품(?)을 “물리적 음악”(physical music)이라 칭했다.
예술가의 똥
예술의 재료로서 오줌보다 극단적인 것은 똥일 것이다. 1961년 이탈리아의 누보 레알리스트 피에로 만조니는 대변을 가지고 엽기적 작품을 만든다. <예술가의 똥>(Merda d’artista)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만조니는 자신의 똥을 캔에 넣어 통조림으로 만들었다. 모두 90캔이 생산되었는데, 그 각각에는 4개 국어(이탈리아어•영어•프랑스어•독일어)로 레이블이 붙어 있었다. “예술가의 똥/내용물 30g net/신선히 보존/1961년 5월에 생산되어 통조림됨.”
원래 이 통조림의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값으로 책정되었다. 시장에 따라 변동되는 것이 금값이기에, 작품(?)의 가격도 국제 금시장의 상황에 따라 변동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것도 작품인 이상, 그것의 가치는 우선 예술시장에서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몇개나 팔렸는지는 모르겠다. 2007년 그중 하나가 소더비 경매에 나와 무려 12만4천유로에 팔렸다고 한다. 과연 예술가의 똥이다.
이 작품에 관련된 유명한 소문이 있다. 실은 그 깡통에 대변이 아니라 플라스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캔을 따면 곧바로 진위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게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캔을 따는 순간 작품은 영원히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 캔의 가격이 무려 얼마던가? 그 소문의 진위에 대해 관련자들의 증언이 엇갈리는 가운데, 어느 예술상이 캔에서 풍기는 대변 냄새를 맡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정말로 그 안에 똥이 들어 있을까?
워홀과 만조니의 깡통
워홀과 만조니는 통하는 면이 있다. 워홀의 아이콘 역시 통조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워홀의 것(‘캠벨’)은 진짜가 아니라 복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의 브릴로 박스 역시 판자로 만든 페이크일 뿐이고, 그 안에 세제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장인의 영역에 공장제 대량생산의 기술을 도입하고, 예술적 가치의 세계에 소비주의 문화의 문법을 도입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팝 아트의 정신이 워홀과 만조니를 하나로 묶어준다.
결정적인 차이는 재료에 있을 것이다. 만조니가 사용한 것은 대변과 같은 인간의 분비물, 이른바 혐오감을 주는 ‘비천한 재료’(abject material)다. 워홀에게는 재료의 물질성과 신체성을 강조하는 이 ‘밑바닥 유물론’(base materialism)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만조니의 통조림은 구강과 항문을 직접 연결하여 우리를 입이 곧 항문인 강장동물의 수준으로 되돌린다. 진화를 거슬러 물질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바타유적 충동이랄까?
워홀과 만조니를 다시 묶어주는 것은 ‘캠벨’이 아니라 외려 ‘소변 회화’다. 워홀의 작품이 대부분 복제를 이용한 구상회화라는 점에서, 앵포르멜에 가까운 비구상을 보여주는 ‘소변 회화’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워홀의 작품은 물질성, 신체성을 드러내며 제대로 ‘혐오예술’(abject art)이 된다. 거기에는 인간에서 동물로, 문명에서 자연으로, 형태에서 물질로, 한마디로 생명에서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이 깔려 있다.
인간의 지각 장이 수직적이라면, 동물의 그것은 수평적이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이 시각에 의존한다면, 사족보행을 하는 동물은 주로 후각을 사용한다. 개는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오줌을 싸고, 고양이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제 똥을 감춘다. 여기서 똥오줌의 분변예술이 어떻게 동물성과 연결되는지 뚜렷이 드러난다.
문명은 중력을 이기고 수직으로 상승하려 하고, 자연은 이를 다시 수평으로 되돌리려 한다. 워홀의 소변과 만조니의 대변은 수직의 스트레스에서 수평의 안식으로 돌아가려는 은밀한 욕망의 표출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의 충동’의 예술적 승화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