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모든 것은 망각의 결과’라는 솔로몬의 말을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용한 것을 보르헤스가 인용한 것을 진중권이 인용한다.” 언젠가 내가 쓴 책의 머리말에 이렇게 적어놓고 뿌듯해하던 기억이 난다. 어떤 묘한 의미에서 이 말은 재귀적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모든 것은 망각의 결과’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서는 아주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인용을 통해 시대마다 망각의 바다에서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원저자의 원저자
쌍용차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표절, 혹은 도용 시비에 휘말렸다. SNS의 세계는 두패로 나뉘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실존주의적 부조리극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나의 실존 역시 그 부조리극 속에서 꽤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오직 ‘망각’만이 궁극적 해법으로 보이는 이 막막한 상황에서 굳이 무의미한 패싸움을 재연할 필요는 없을 거다. 중요한 것은 ‘사안’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논점은 두 가지다. 첫째, 공지영이 집필에 하종강의 칼럼을 기초 자료로 원용했는데, 그 칼럼 자체가 실은 르포작가 이선옥의 글을 인용한 것이었다. 공지영은 칼럼에 원저자의 이름이 빠져 있어 하종강의 것으로 알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하종강과 이선옥의 생각은 다르다. <의자놀이>를 위해 다양한 자료를 두루 섭렵한 공지영이 원래의 글이 이선옥의 것임을 몰랐을 리 없다. 따라서 원작자의 이름을 고의적으로 누락했다는 주장이다.
둘째, 칼럼이 인용되는 바로 그 자리에 저자인 하종강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고, 이를 책 뒤의 참고문헌 목록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출판사는 그 자리에 출처를 표기하는 것이 독자의 정서적 몰입도를 떨어뜨리기에, 저자와 협의하에 그것을 책 뒤로 돌렸다고 해명했다. 하종강과 이선옥은 출처의 표기가 책 뒤로 돌아감으로써 문제의 대목이 마치 공지영이 직접 쓴 것처럼 보인다며, 이 역시 다분히 고의적인 표절이라 의심한다.
저자의 권리
일반적으로 출처를 밝히지 않고 남의 글을 갖다 쓰는 것을 ‘표절’, 허락도 없이 남의 글을 갖다 쓰는 것을 ‘저작권침해’라 한다. 하종강과 이선옥은 물론 <의자놀이>가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고 본다. 문제가 된 대목이 출처가 이선옥임을 밝히지 않은 상태로 인용됐고, 그 과정에서 원저자인 이선옥의 허락을 받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불행히도 ‘공지영이 하종강 칼럼의 원저자가 이선옥임을 알았을 것’이라는 추측에 기초해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옆집에서 허락을 받아 연장상자를 빌려 쓰는데, 갑자기 윗집 사람이 나타나 상자 속의 도구 몇개가 자기 거라며 “왜 허락없이 남의 연장을 사용하느냐”고 타박을 한다. 황당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옆집 아저씨가 그를 거들기까지 한다면. 나중에 문제삼을 것이었다면, 하종강은 그 글의 사용을 허락하던 그 순간에 공지영에게 자기 글이 이선옥의 것을 인용한 것임을 분명히 고지했어야 한다.
출처도 없는 원저자에 대한 책임까지 물을 수는 없는 일. 공지영은 칼럼을 인용하며 하종강의 허락을 받았고 출처도 명기했다. 그것은 책의 말미에 표기한 것은 몰입을 위한 것일 뿐, 남의 글을 훔치기 위한 장치로 보이지 않는다. 수십명에 달하는 다른 저자들에게도 일일이 연락해 허락을 받은 것도 그녀에게 도용의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어느 저작권 전문가는 학적 양심을 걸고 이를 ‘표절’이나 ‘저작권침해’라 볼 수 없다고 판정했다.
대의를 위한 익명성
이 상황에서 취해야 할 적절한 조치는 아마도 출판사에 연락해 이 사실을 저자에게 알리고 다음 판부터는 원저자의 이름을, 인용된 바로 그 부분에 표기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하종강과 이선옥은 이 선을 넘어 공지영의 입장 표명을 촉구하며 책의 ‘배포 금지’를 요구했다. 이 사안을 ‘표절’이자 ‘저작권침해’로 판단한 것이다. 이는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과도한 대응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공지영은 그만 자존심이 크게 상하고 만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하종강의 칼럼에서 이선옥은 기꺼이 익명으로 남았다. 중요한 것은 쌍용차 노동자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것이므로 글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면 출처 표시는 굳이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는 공지영이 출처의 표기를 책의 뒤로 돌린 이유와 일치한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널리 알린다는 목표도 동일하다. 그런데 이선옥은 왜 이번에는 기꺼이 익명으로 남으려 하지 않았을까?
이선옥은 하종강은 자신의 허락을 받았으니 경우가 다르다고 말할 게다. 하지만 공지영도 글의 원저자가 이선옥임을 알았다면 기꺼이 허락을 구했을 거다. 수십명에 달하는 저자들에게 일일이 허락을 구하며 설마 이선옥만 달랑 빼놓겠는가? 듣자 하니 그들은 출판사로 찾아가기까지 했다.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울음을 터뜨린 직원들을 보며 하종강은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저자는 출판노동자들 뒤로 숨었다’고 한탄했다. 그들은 왜 울었을까?
이선옥이 하종강의 칼럼에서 익명으로 남은 것은 그런 종류의 르포가 가진 독특한 성격 때문이리라. 물론 ‘저작권’의 측면에서 보면, 문제의 글은 엄연히 이선옥의 작품이다. 거기에는 그의 문체가 들어가 있고, 질문을 준비하고 답변을 가공하고 서사를 구축하는 지난한 노동이 들어가 있다. 르포라 해서 현실을 녹음기처럼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건조한 인터뷰에도 저자의 관점이 들어가 있기 마련. 그것은 권리를 보호받아야 할 창작물이다.
하지만 ‘콘텐츠’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의 대목은 노동자가 말한 것을, 정혜신 박사가 들은 것을, 이선옥이 기록한 것을, 하종강이 인용한 것을, 공지영이 재인용한 것이다. 그 글의 임팩트는, 문학적 가공으로 증폭되는 측면이 있겠지만,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의 가공되지 않은 처절한 목소리에서 나온다. 이 목소리는 사회적으로 널리 복제되고 공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두 작가의 시각은 엇갈린다.
공지영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선옥의 ‘문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음성’이라 본다. 반면 이선옥은 공지영이 빌려간 게 어차피 자신의 문장이라고 믿는다. 갈등 끝에 공지영은 정혜신씨와 직접 인터뷰를 갖고 그 부분을 고쳐 쓴다. 그리고는 자신과 노동자 사이에 끼어 있던 ‘이선옥-하종강’을 제거해도 제 책에는 아무 지장이 없음을 과시하듯이 내뱉기를, “내 것이 더 낫네요.” 그 뒤로 벌어진 난장은 상상에 맡기겠다.
‘저작권’이라는 사유재(?)와 ‘노동자의 목소리’라는 공유재(?)의 충돌. SNS에서 벌어지는 논란의 핵심도 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관련이 있다. 이선옥은 배포 금지를 요구했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그녀가 노동작가라며 “공유재를 사유화했다”고 비난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대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폭력”이라고 반박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논쟁에서는 전통적인 좌우의 입장이 묘하게 뒤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착오에서 비롯된 사소한 문제. 그 문제가 졸지에 적개심을 장전한 온갖 해방의 서사들이 난무하는 뜨거운 계급전으로 비화했다. 소인국 사람들은 달걀의 위를 깨느냐 밑을 깨느냐를 놓고 전쟁을 벌인다. 걸리버의 눈에는 한심해 보일지 모르나, 적어도 소인국 사람들에게 그 문제는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