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링(featuring) 소설이란 걸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두 번째 소설집을 낸 2008년 즈음이었는데,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온몸을 배배 꼬던 시절이었다. 설탕을 잔뜩 묻힌 굵직한 꽈배기를 생각하면, 그게 딱 나였다. 피처링 소설이란, 힙합 곡을 만들 때처럼 내가 소설의 주요 부분을 다 쓰고 동료 작가들에게 부분적인 참여를 부탁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재미날 것 같았다. 웃기는 대사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에게 몇 장면의 대화를 부탁한다든지, 잔인한 묘사를 잘하는 작가에게 사람 죽이는 장면을 부탁한다든지, 옷차림을 상세히 묘사하기로 유명한 작가에게 모든 등장인물의 모든 패션을 부탁한다든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을까. 소설 속 피처링 부분을 알아맞히는 것도 재미난 놀이가 되지 않을까. 실제로 몇몇 작가들에게 피처링 소설을 설명했더니 (불가능한 프로젝트란 걸 눈치챘기 때문인지) 흔쾌히 수락을 해주었다.
소설을 빨리 써야 한다는 게 함정이었다. 단편소설은 대체로 청탁이 있어야 썼다. 피처링 소설을 완성하려면 마감보다 일찍 소설을 끝낸 다음 피처링 부분을 동료 작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마감 날짜를 수시로 어기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피처링 소설이란 이름을 잊어버렸다. 마감하기도 급했다. 그때 흔쾌히 피처링을 약속했던 작가들이여,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한가해지면 반드시 피처링을 부탁하러 찾아가겠다. ‘그런 약속 한 적 없다,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곤란하다’, 이러기만 해봐.
누군가 나에게 피처링을 부탁하는 순간을 그려볼 때도 있다. 누군가 나를 찾는다면 어떤 이유일까. 나다운 게 뭘까, 내가 잘하는 게 뭘까, 김중혁만의 스타일이라는 게 있을까. 결국 예술이란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나가는 것이고, 사람들이 탐낼 만한 고유성을 획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저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대사를 무척 잘 쓰는 작가입니다.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윤종신의 ‘월간 윤종신’을 보면서 (방식과 스케일이 전혀 다르지만) 그때의 피처링 소설이 생각났다. 나처럼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몸으로 부딪쳐서 실현하는 사람도 있다. 매달 새로운 뮤지션과 함께 새로운 곡을 탄생시키는 윤종신을 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매번 장르도 다르고, 곡도 다 좋다. 하림과 함께한 (이번에는 피처링이라고 쓰지 않고 ‘with’라고 썼다) 8월의 월간 윤종신 ≪자유로 SUNSET≫도 좋았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거대한 노을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 풍경은 뭉클하기도 하고 숙연하기도 했다. 해가 지는 것일 뿐인데 왜 그럴까. 누군가 그립기도 했고, 아무도 그립지 않기도 했다. 그 순간의 감정들이 노래 한곡으로 되살아났다. 차를 없앤 걸 후회하지 않지만,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면서 일산 방면으로 자유로를 타고 달리다 해질녘 노을을 만나던 순간은 가끔 그립다. ≪자유로 SUNSET≫이 흘러나온다면 더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