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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자>에서 <블랙 호크 다운>까지, 리들리 스콧 영화의 스펙트럼
2002-01-25

유혈의 스펙터클을 쥔 흥행의 검투사

2001년 3월25일 제73회 오스카 시상식이 거행된 LA 슈라인 오디토리엄. 저녁 내내 펼쳐진 <글래디에이터>와 <트래픽> <와호장룡>의 숨찬 레이스가 마지막 코너를 돌 무렵, 아카데미는 <트래픽>의 스티븐 소더버그를 감독상 수상자로 호명했다. 해묵은 큐시트대로 명예로운 패자들의 반응을 훑어가는 TV 중계 카메라. 그러나 겸손한 축하와 세련된 승복의 몸짓이 꽃피운 화기애애한 그림 속에서 한명의 패자만은 얼어붙은 표정을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작품상을 바친 쇼의 대단원도 그의 불편한 심기를 위안하지는 못했다. 떠도는 말처럼 존경은 받아도 사랑은 쉽사리 받지 못하는 까칠한 성품이 아카데미 회원들의 경원을 산 탓일까. 그렇지 않아도 만사가 못마땅해 보이는 리들리 스콧(64) 감독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자존심의 상처로 더욱 가파르게 날이 섰다.

비타협적 스타일의 전쟁 스펙터클 <블랙 호크 다운>으로 오는 3월 다시 오스카 성벽을 향해 진격할 군장을 꾸리고 있는 노장 리들리 스콧은, 평생 우기와 가뭄을 번갈아 견뎌온 사바나의 성미 고약한 늙은 사자와 닮았다. 그는 한번 송곳니를 박아 넣은 먹이는 절대 놓지 않으며 오스카 파티의 한 장면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질투심도 강하다. 1970년대 후반 동료 영국감독 앨런 파커가 자기보다 한발 앞서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았을 때 리들리 스콧은 “샘이 나서” 일주일을 끙끙 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가진 것이 많으면서도 허기에 시달려온 사나이다. 13편을 헤아리는 스콧의 장편영화 필모그래피는 역대 박스오피스 통계 상위권에 <에이리언> <델마와 루이스> <글래디에이터> <한니발> 등 무려 네편을 올려놓았고, 무엇보다 SF영화를 포함한 사이버펑크 문화상품의 지존 <블레이드 러너>가 그의 피조물이다. 보이지 않는 재산이 전부는 아니다. 스콧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광고회사 ‘리들리 스콧 사단’(Ridley Scott Associates)의 보스이며, 동생인 토니 스콧 감독과 함께 사들인 디지털 특수효과 전문회사 ‘밀’(The Mill)도 그의 소유다. 반면 궂은 날도 있었다. 리들리 스콧은 4년에 달하는 시간과 공력, 애정을 쏟은 판타지 <레전드>의 침몰을 목도했고, 한껏 지명도가 치솟은 상태에서 만인의 주시 속에 <화이트 스콜> <지 아이 제인>으로 이어진 스펙터클한 슬럼프의 치욕을 맛보았으며, 연출한 영화들을 번번이 오스카의 다양한 부문에 후보로 올리고도 정작 감독상은 안아보지 못한 욕구불만의 감독이기도 하다.

이래도 성이 차지 않느냐

리들리 스콧이 삶의 항로를 틀어놓은 영화로 꼽는 작품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보러 간 <시민 케인>. 이보다 흔한 ‘내 인생의 영화’가 있을까. 그러나 스콧의 회상은 흥미롭다. 이 미래의 스타일리스트는 영화의 복잡한 플롯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크린 위의 모든 내용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심히 궁리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단 심지에 불이 붙자 소년은 동네 극장의 붙박이 관객이 됐다. 집중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었던 외골수 스콧은 늘 동행도 없이 스크린과 독대했고, 어느날 크레디트에서 아트디렉터라는 직책을 발견하고 “저거라면 나도 해볼 만하다”는 당돌한 뜻을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미술 이외의 과목에 무관심했던 스콧은 영국 왕립미술대학을 거쳐 <BBC>의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오래지 않아 스콧은 잔소리와 불평으로 사내에서 악명을 높였고 항복한 방송사는 그에게 연출을 맡기기에 이른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을 세상에 알린 것은 CF였다. 1968년 <BBC>를 떠나 광고 프로덕션을 차린 스콧은 명감독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스콧과 더불어 영국 광고계의 뉴웨이브를 주도한 이름으로는 몇해 뒤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서양을 건너간 데이비드 퍼트냄과 휴 허드슨, 애드리안 라인 등이 있었다.

CF로 돈을 모아 마침내 장편 입봉작 <결투자>를 완성했을 때 리들리 스콧은 이미 불혹의 나이였다. <결투자>는 명예싸움에 평생을 소모한 프랑스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조지프 콘래드의 단편을 각색한 시대극. 튀는 비주얼에 대한 스콧의 욕심은 데뷔작부터 남달라서, 배우 하비 카이틀은 자동차 배터리를 연결해 칼날에 섬광을 일으키려 한 감독 덕택에 가엾게도 감전사고를 무릅써야 했다. <결투자>는 칸영화제에서 신인감독에게 수여되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건실한 주류영화 시장이 부재한 영국 영화산업이 배출한 유능한 감독들이 모두 그랬듯이 리들리 스콧에게도 선택의 때가 왔다. 변방의 저예산 영화작가로 작지만 안온한 정원을 가꿀 것인가, 할리우드로 건너갈 것인가. 리들리 스콧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에이리언>을 통해 두 번째 길을 택했다. 그리고 감독 스스로 “나의 가장 사적인 영화”라고 부르는 <블레이드 러너>를 필두로 한 그의 80년대 작품들은 거칠고 야한, 또는 소수 취향인 B급영화의 미학과 소재를 끌어오면서도 기술적 조악함을 걷어낸 오락영화라는 점에서 199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경향을 예고했다.

그러나 관객이 여태 경험한 적 없는 드라이브를 선사한 <델마와 루이스>의 엔진이 식자마자 찾아온 리들리 스콧의 세기말은 우울했다. 15세기 스페인의 영화(榮華)를 재현한 솜씨만 회자된 , 표류로 끝난 해양판 ‘죽은 시인의 사회’ <화이트 스콜>, 스콧이 페미니스트라는 항간의 오해에 시원섭섭한 종지부를 찍은 <지 아이 제인>. 비판에 그다지 너그럽지 못한 스콧 감독에게 일련의 실패가 가져다줬을 스트레스와 분발을 상상하긴 어렵지 않다. 딱히 60살을 맞아서는 아니겠으나 리들리 스콧은 1997년 더 많은 영화를 더 빨리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겠다는 노선을 정했다. “처음 10년 동안 나는 기다리고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다음 일을 까다롭게 고르는 데에 많은 시간을 썼다. 하지만 결국 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무슨 항암제를 개발하는 게 아니잖은가?” TV시리즈를 제작하며 1990년대 말을 보낸 리들리 스콧은, 정말 ‘팝콘 무비’의 황제로 여생을 보내기로 작심이라도 한 듯 슈퍼헤비급 오락영화 <글래디에이터>와 <한니발>을 연달아 내놓았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무덤에서 부활시킨 서사극 <글래디에이터>와 오랫동안 기다려진 속편 엽기스릴러 <한니발>은, 비록 장르는 다르지만 감정을 조작하고 말초신경의 자극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후안무치’하고 대담한 연출에 있어서는 쌍둥이다. 유혈의 스펙터클을 공통의 흥행 무기로 구사한 두 영화에서 리들리 스콧은 ‘뉘앙스’라는 단어는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감독처럼 행세한다. 그리고 <글래디에이터>의 장군 막시무스가 콜로세움의 관중에게 일갈했듯 이래도 엔터테인먼트가 성에 차지 않느냐고 윽박지른다.

감정, 아직도 그에겐 미답의 땅

특정 장르나 철학으로 리들리 스콧의 영화들을 묶어내는 작업은 부질없어 보인다. <에이리언>을 연출할 무렵 스콧은 리플리의 성별이 여자라는 사실에 별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가 뒤늦게 인식했다고 말한 바 있다.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는 수많은 영화학도들에게 글감을 제공한 <델마와 루이스>에서도 그는 델마와 루이스를 그저 남성 캐릭터와 똑같이 다루었을 따름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블레이드 러너>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으나 스콧은 그 무렵 형의 죽음이 가져다준 인간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중요한 모티브로 언급하기도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복잡한 의도없이 영화를 만들고 나면 사람들이 와서 각주를 달고 온갖 질문을 던지고 의견을 묻는 형국이었던 셈이다.

어떤 세계관이나 ‘주의’ 대신 리들리 스콧의 머리를 점령하고 있는 가치는 영화 만드는 작업 자체의 정밀함과 완벽성이다. 이같은 가정의 근거로는 CF에 대한 리들리 스콧의 애착을 들 수 있다. 리들리 스콧은 CF를 영화로 도약하는 단순한 스프링보드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꽉 찬 프레임을 몇분의 1초 단위로 이어 붙이는 CF 연출의 정확성을 사랑한다. 길이에 비해 넉넉한 예산이 주는 자유도 물론. 보수적인 황금빛 노스탤지어로 유명한 호비스 식빵 광고부터 최근의 오렌지 이동통신 광고까지, 어떤 물건을 파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광고 만들기의 본성은 리들리 스콧의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한편 내심을 털어놓지 않는 데에 익숙한 세대의 영국인인 리들리 스콧은 규율을 숭상하고 감정의 속살을 드러내는 일을 불편해한다(실제로 군인의 아들이기도 한 스콧은 <블랙 호크 다운>의 현장에 일급 병력이 합류했을 때 매우 흡족해했다고 전해진다). 또 제리 브룩하이머는 스콧에 대한 인물평으로 “위험을 감수하기를 즐기며 세트에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령관”이라는 표현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들은 약하고 무질서하고 신조가 없어.” <한니발>의 렉터 박사가 뇌까리는 경멸섞인 말을 흘려들을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반면 리들리 스콧은 감정이나 에로틱한 묘사를 어색해하고 베드신을 기피한다. 그가 연출의 가장 어려운 대목으로 꼽는 것은 배우들과의 대화. 그래서 그가 감정의 영역에 내키지 않은 발을 들여놓을 경우는 머리에서 나온 감정이거나 전형들로 구성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영화도 만들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시추에이션과 액션의 정교한 재연만으로 러닝타임 전부를 채운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스타 비히클’(한 스타를 내세워 그의 성격에 맞게 만들어진 영화)이다. <블랙 호크 다운>은 보통 할리우드 전쟁영화와 달리 주인공의 성격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군인들의 개인사, 심지어 공습 전후의 맥락 설명까지도 생략한다. “그들은 6주 전부터 모가디슈에 있었다. 가족이나 과거 사연에 대한 대화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다 끝난 거다”라고 리들리 스콧은 궁금증을 일축한다. 스펙터클의 구성이 고스란히 '스토리’가 되는 이 영화에서 스콧은 무리하게 이야기와 심리를 지어낼 필요없이 자신의 장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최근의 사건을 다룬 만큼 <블랙 호크 다운>도 뜨거운 질문들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정치적 해석에 대한 리들리 스콧의 입장은 솔직하고 간단하다. “동의하는 정치적인 관점이 있다면 거기에 입각한 영화를 만들 것이다. 심지어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정치적 관점의 영화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애초에 답이 없었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블랙 호크 다운>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오늘날의 군인들은 특정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어떤 무기와 장비를 쓰는지의 실상이다. 리들리 스콧은 전투의 배경이 아닌 전경에 집중하고, 그 투철한 응시 속에서 어느 순간 아주 건조한 의미가 걸러진다. 이를테면 다른 나라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무수한 뇌관을 품은 혼돈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라는.

<블랙 호크 다운>의 개봉 일정을 3월에서 12월로 앞당긴 결정이 아프가니스탄에 특수부대를 보낸 미국의 애국 무드에 편승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리들리 스콧은 변명 비슷한 것도 하지 않는다. “3개월 뒤 사태가 어떻게 발전할지는 모른다. 전쟁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금 개봉하는 것은 이치에 닿는다. 안 될 이유는 또 뭔가? 영화의 힘이 가장 강할 때 한번 해보는 거다.” 무리 중에 점찍은 단 한 마리의 먹이만 끝까지 뒤쫓아 활강해 기어이 숨통을 물어뜯는 검은 매, 그것이 리들리 스콧이다.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 <블랙 호크 다운>, 전쟁영화의 새로운 걸작이 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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