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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친구야, 너도 보고 있지?

H.O.T 열성팬이던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

부반장 경선이는 강타 오빠의 팬이었다. 작고 마르고 목소리가 가늘었던, 수업시간이면 안경을 챙겨 끼고 첫째 줄에 앉아 선생님과 칠판에 시선을 고정하던 경선이에게 성적과 입시 고민은 인생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워 학원이나 과외도 포기하고 항상 공부에 지친 얼굴이던 경선이가 유일하게 눈을 빛내며 말이 많아지는 시기는 H.O.T의 새 앨범이 나올 때였다. 학교 앞 음반가게에 며칠 전부터 예약을 해두고 애써 모은 용돈으로 CD를 세장이나 사서 감상용과 소장용, 선물용으로 나누는 경선이와 함께 하교하는 날이면 무조건 이어폰 한쪽씩 나눠 끼고 H.O.T의 노래를 들어야 했다. 지루하고 팍팍한 수험생활 가운데 강타 오빠에게서 삶의 모든 즐거움과 희망을 얻던 경선이가 오빠의 살인미소와 착한 마음씨를 진지하게 찬양할 때면 어쩐지 경건한 기분마저 들곤 할 만큼, 그 시절 우리에게 오빠들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존재였다.

tvN <응답하라 1997>은 바로 그 1997년, 오빠들이 우리의 영혼까지 지배했던 나날들에 대한 드라마다. ‘안승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열성적인 토니 팬, 부산 여고생 성시원 역을 맡은 에이핑크의 정은지가 공개방송에서 낯익은 하얀 비닐 우비 차림으로 춤을 추며 <전사의 후예>를 완창하던 순간 내 심장박동이 미친 듯 빨라진 것은 마치 데자뷰를 보는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시원의 방을 도배한 H.O.T 브로마이드를 보며 “대가리 색색깔로 물들인 여시 같은 새끼들”이라며 혀를 차는 아빠(성동일)나, 강타 부인을 자처하며 ‘동서지간’의 우정을 나누다가 “여섯개의 수정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버린 걸 어쩌겠나”라는 고백과 함께 젝스키스 팬으로 옮겨가버린 시원의 단짝 유정(신소율)도 어째 낯설지 않다. 시원을 좋아하는, 전교 1등에 잘생긴 얼굴과 무심한 애정 표현까지 갖춘 윤제(서인국) 같은 훈남의 존재만 제외하면 <응답하라 1997>은 바로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게다가 당시 토니의 차로 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던 ‘포카리’부터 콘서트 예매를 위해 제일은행 앞에 밤새 줄을 서던 풍경까지, 꼼꼼하게 재현된 과거와 고난도의 사투리 대사를 완벽히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드물게 기본이 탄탄한 드라마의 힘을 보여준다. 지금 생각하면 번거롭기 짝이 없어도 그때는 한없이 소중했던 삐삐와 워크맨 등 디지로그 세대의 아이템을 다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응답하라 1997>은 복고라는 유행에 편승해 추억을 도매금으로 팔아넘기는 대신 사람과 삶, 공간과 시간에 대한 애정과 충실한 이해로부터 만들어진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함께 자란 소년소녀의 첫사랑 코드는 그간 순정만화는 물론 때깔 고운 멜로드라마에서 손발이 오그라들게 우려먹은 바지만, 시원과 윤제의 캐릭터가 전형성을 벗어나 생명력을 얻고 둘 사이에 쌓인 시간의 무게가 설득력을 더하면서 풋풋한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윤제의 짝꿍 준희(호야)가 윤제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만들어진 독특한 삼각관계 또한 과감한 설정이지만 과장되게 그려지거나 희화화되지 않는다.

어느 하나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그러나 하나하나 살아 있는 등장인물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접근은 내가 요즘 매주 화요일 밤 TV 앞에서 낄낄대며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설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우리에게, 그 시절 오빠들은 독점하고 싶은 연인이 아니라 손에 닿지 않을 별처럼 멀지만 빛나는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가끔 궁금해진다. ‘타야 마눌’을 자처하던 경선이도 <응답하라 1997>을 보고 있을까. 나처럼 종종 울고 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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