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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소설과 건강하게 연애하고 싶다”
김혜리 사진 오계옥 2012-08-10

소설집 <비행운> 낸 김애란 작가

Profile

2002 단편 <노크하는 집>이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 당선 2005소설집 <달려라 아비>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2007 소설집 <침이 고인다> 출간 2008 단편 <칼자국>으로 이효석 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2009 <침이 고인다>로 신동엽 창작상 수상 2011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 출간 2012 소설집 <비행운> 출간

김애란 작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읽은 이후 한동안 지하철을 타거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거나 고시원을 지나칠 때면 꼭 거기 앞머리로 고양이를 닮은 눈빛을 가린 그녀가 있을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다. “소통하자니 미안하고 안 하자니 무서운”(문학평론가 신형철)으로 요약되는 21세기 서울 20대들의 일상 공간에 대한 김애란의 묘사는 그만큼 생동했다.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코끝에 훅 라면 냄새가 끼쳐왔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지난해 여름. 지하철을 타면 김애란의 환각 대신 그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손에 쥔 사람들이 자주 보였다.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아름이는 열일곱 동갑내기 엄마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조로증 소년이다. 마치 자기 앞에 놓인 생이 길지 않기에 음수의 삶에 애착하듯이 소년은 본인이 잉태되기 전 어린 부모의 사랑을 소설로 쓴다. 요즘 말로 무척 ‘웃픈’(웃기고 슬픈) <두근두근 내 인생>은 부재하는 아버지의 어깨를 농담과 상상으로 감싸안고 어머니를 자매처럼 바라보아온 김애란 문학의 우화적 결정(結晶)으로 보였다. <비행운>은 이후 만 1년 만에 나온 김애란의 세 번째 단편집이다. 제목인 ‘비행운’은 비행기가 하늘에 남기는 궤적을 가리키는 동시에 행운의 여집합을 암시한다. 김애란은 행운을 바라지 않은 채, 이제 어디로 날아가려 하는가?

-<애란>(愛亂)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그 애란은 ‘사랑 애’자에 ‘어지러울 란’자일 텐데, 정성일 선생님이 시나리오를 썼다고 들었다. 나는 빛날 란(爛)을 쓴다. 김연수 선배가 좀 야한 그 영화의 사진을 “애란, 이게 뭐야? ㅋㅋ”라는 문자랑 보낸 적 있다. (웃음)

-쌍둥이 자매로 알고 있다. 덕분에 보통 사람보다 먼저 깨우치거나 성격에 영향받은 면이 있을까. =형제간엔 서열이 있기 마련인데 동갑인 형제라는 사실이 특별했다. 황석영 선생님께서는 “똑같은 애가 눈앞에 있으니 어려서부터 자신을 타자화하게 돼서 개그감이 생긴 거다”라고 하시더라.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한편, 등단 이래 주로 칭찬받아온 당신으로선 이례적으로 김윤식, 이명원 평론가 등에게 강력한 비판도 받았다. 웃을 수 없는 상황인데 굳이 유머를 구사했다거나 이야기의 성격에 비해 너무 산뜻하다거나, 장편으로서 결점이 있다는 점이 지적됐는데. =다양한 반응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다. 이미 그렇게 독해를 마치셨는데 그 바깥에서 내가 다시 설명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쓸 때는 오히려 너무 뜨거워질까봐 조심했는데 어느 분은 온도가 너무 높다고 하고 어느 분은 너무 낮다고 하시니 체감온도차가 큰 소설이구나 싶었다. 다만 인물이 너무 추운 환경에서 몸을 녹이려고 춤을 추는데 춤사위만 보고 왜 이 상황에서 춤을 추냐고 말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긴 했다. 보편성이 부족한 소재라는 비판도 있었는데 주인공이 앓는 병은 희귀하지만 누구나 늙고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의 자식이며, 부모가 될 가능성이 있거나 이미 된 사람들이니 공감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 서점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을 보니 45쇄더라. 그만 한 수의 사람이 자신의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은 모종의 기운을 형성할 것 같은데. =지나치게 좋은 일이 생기면 인생한테 시험당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오히려 이게 뭘까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도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행운일 거란 생각을 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 잘됐을 때도 하나님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여러 패 중 하나를 주신 듯한 느낌이었다.

-<비행운>은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의 제목이 아니다. 단, 공항 환경미화원이 등장하는 <하루의 축>에 비행운이 묘사된다. 이 제목이 전체를 포괄한다고 판단한 이유가 뭔가. =어딘가로 떠나거나 도착하지 못한 인물이 많이 나오니까 비행운(飛行雲)이 어울린다 싶었고 비행운(非幸運)을 의미하는 중의적 말장난도 있었다. 불운과 비행운의 차이는… 내가 소설 속 인물의 삶을 불운하다고 단정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김애란의 소설을 크게 보면 자기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비행운>에서는 그런 모티브가 흐려진 인상을 받았다. =부모의 성(性)에 대해 쓸 때 유난히 흥이 나곤 했다. <침이 고인다>부터 그런 기미가 있긴 했는데 <비행운>은 능청떨고 딴소리하고 쾌활하게 말하는 <달려라 아비>와는 또 다른 내 충동이 표현된 소설집 같다. 집필 당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나 소식에 영향도 받았다.

-<비행운>에서 가장 시간을 들여 읽은 단편은 <물속 골리앗>이다. 심리보다 물리적 움직임과 상황의 표면을 묘사하는 문장들로 이뤄져 있어 두드러진다.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 얀 마르텔의 <파이 이야기>도 생각났다. =어느 해인가 지구가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비가 쏟아졌는데 재개발 구역, 크레인 같은 소재가 더해져 단편이 됐다. 당시 살던 고지대 원룸에서 운동장 두개만 한 작은 동네가 내려다보였는데 동네가 철거되고 땅이 다져지고 아파트가 완공되는 전 과정을 지켜봤다. 대형 크레인이 기우뚱할 때는 한쪽 팔만 든 십자가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재개발 구역으로 이사한 신혼부부가 나오는 <벌레들>과 <물속 골리앗>은 쌍둥이 단편일 수도 있다. <벌레들>의 공사장 폐허에서 태어난 아기가 자라 <물속 골리앗>의 소년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생각했다. 문체 면에서는, 명랑하고 아기자기한 문투도 좋아하지만 코맥 매카시 같은 황량하고 터프한 문장을 동경해온 면이 있다. 역시 상반된 나의 두 충동이다. 작품을 읽을 때 압도당하고 싶은 ‘노예심리’ 같은 게 있지 않나. 쓰는 자신도 몰아세우고 싶고.

-당신의 소설적 공간은 항상 집보다 방이었는데 <벌레들>을 읽으며 이제 집이구나 싶었다. =오랜 자취 경험이 제일 컸을 거다. 누가 결혼하니까 어떠냐고 물어봐서 냉장고랑 따로 자서 좋다고 했다. (웃음)

-<서른>은 당신의 소설에서 거의 처음으로 화자가 ‘가해자’다. 살다보니 나도 남을 해치더라는, 연륜에 따른 깨달음인가. =서른 즈음 타인을 해치기 시작한다기보다 죽 그렇게 살았는데 모르다가 서른 즈음에 문득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다른 단편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도 비슷한 각성을 하는 여자가 나온다.

-유머는 김애란을 말하는 키워드였다. 그러다보면 재밌게 쓰려는 강박도 생길 텐데 <비행운>은 전작보다 유머가 적다. =내가 재치가 있는 편이란 점에 대해 우쭐한 마음도 있었고, 지금까진 어떤 곤경에도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인물들이 많았는데 <물속 골리앗>을 쓰면서 농담을 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소설은 진지하면서도 활력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데 그 활기가 줄어들지 않았나 걱정이 된다. 유머가 줄어드는 추세라기보다 다른 충동이 번갈아 앞서는 길항의 과정인 것 같다.

-어떤 코미디를 좋아하나. =김준호, 유세윤, 예전의 신정환씨와 윤종신씨. 공통점은 ‘다정한 하대’랄까? 사람들은 친하지 않을수록 친절하지 않나.

-<그 곳에 밤, 여기에 노래>와 <하루의 축>은 취재가 수반됐을 것 같은데. =<그 곳에 밤, 여기에 노래>는 술자리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만난 택시 기사님들께 쉬는 날을 여쭙고 양해를 구해 세분 정도 인터뷰를 했다. 맨 정신엔 못 그러는 성격인데 알코올 기운을 빌린 거다. (웃음) <하루의 축>은 공항에 몇 차례 가고 자료를 봤지만 인터뷰는 못했다. ‘이야기 약탈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작가로서 아무래도 배우를 상상하게 되지 않나. =어디선가 성석제 선생님이 공효진, 류승범씨가 아름이 부모 역으로 어떨까 하신 적이 있다. 나는 토라진 사춘기의 얼굴에 끌리는 면이 있어서인지 <건축학개론>의 이제훈씨를 보며 아름이 아빠로 어떨까 싶었는데 작품에 맞아서인지 그냥 내가 좋아서인지 혼란스럽더라. (웃음)

-‘울퉁불퉁하다’, ‘납작하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말의 느낌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아름이가 낱말카드를 갖고 논다. 나 역시 소설을 쓸 때 단어, 문장으로 카드게임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 사랑, 자유, 윤리 같은 단어를 직접 쓰려면 얼굴이 빨개진다. 그 단어가 옳다고 내가 하는 얘기가 옳을 순 없다. 낱말카드를 구겨 주름과 부피를 만들고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허파꽈리처럼 세계와 닿는 표면적을 넓혀주는 것이 소설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라고 믿는다.

-김중혁 작가와 대담에서 초심을 많이 잃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잃었나. (웃음) =심심한데 초심이나 잃어볼까 했던가. (웃음) 예전보다 소설과 그것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많이 궁금해졌다. ‘작가의 말’에서 비장하게 소설이 나의 신앙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쓴 적이 있는데, 소설을 너무 모시지도 않고 소설과 건강하게 연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