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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락펴락, 왕이로소이다
정리 이주현 2012-08-07

배역-<멍청이들>(가제)에서 아들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잘난 아버지

TO 배우 백윤식

지금 나는 심각한 딜레마에 처했다. 그러니까, 지금 구상하고 있는 장편 데뷔작의 내용을 밝힘과 동시에 그 안의 구체적인 캐릭터를 내가 짝사랑하는 배우에게 맡아달라는 고백을 만천하에 대고 해야 한다 이거지. <씨네21>은 이것이 아름다운 장면이 될 거라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아무렴. 야구장 전광판으로 중계되는, 지금은 가진 게 없어도 열정과 비전으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반지를 내밀고 무릎 꿇는 청년의 진심어린 사랑 고백은 언제나 훈훈하니까. 물론 그 남자가 거절당한 반지를 들고 쓸쓸히 길을 거닐다 마음을 빼앗긴 다른 여자에게 같은 반지로 고백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 여자가 남자를 째려보며 “그거 절 위해 만든 거 아닌 거 다 알아요” 하고 매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서야 전광판 프러포즈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며 순결을 잃은 반지를 장롱 속에 감춰버리는 슬픈 미래가 기다릴지도 모르지만! 흑. 그러니까 그 청년이 나다. 그러니까, 반지(=장편 데뷔작)는 진짜로 결혼할 사람에게만 내밀면 안될까요? 농담 아닌데.

하지만 내 상상 속에선 그분이… 그 역할을 맡아버렸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따버린 맥주병이다. 그분은 백윤식 선생님이고, 그 역할은 아들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잘난 아버지이다. 지인의 아버지 중에 이런 분이 계셨다. 이를테면 아들이 코넬대학에 합격을 해도 하버드에 못 간 게 못마땅한 아버지였다. 그는 아들이 만나는 친구에서부터 사귀는 여자, 인턴십을 하는 회사까지도 일일이 점검하고 지정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의 아들은 좋아하는 여인을 그놈의 하버드에 다니는 훤칠한 선배에게 빼앗긴 뒤 매일 노래방에서 꼬인 혀로 <The Winner Takes it All>을 열창했다고 한다. 딱 이런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달아나겠다고 아버지의 수억원대 자산을 훔쳐 집을 나온 어리바리한 청년으로부터 <멍청이들>(가제)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문제는 가출한 첫날, 아들이 들고 나온 모든 걸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려는 아들과 온갖 어수룩한 이십대의 젊은이들이 엮이면서 소동이 이어진다. 얼핏 상황 수습은 성공하는 듯도 보인다. 아버지가 현장에 나타나기 전까지. 그의 존재는 압도적이다. 그가 필사의 가출을 거대한 실수로 만들어버린 아들의 얼굴을 대하고 던진 첫마디는 “재밌냐?”다. 상종할 가치도 없는 멍청이들을 새 친구라고 감싸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린다. 관객이 그의 눈빛에 얼어붙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이 영화에선 그가 신이고, 그가 왕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실제로 아버지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등장하는 부분은 클라이맥스의 몇신뿐이다. 그전까지 관객은 도망쳐 나온 아들의 증언과 행동을 통해 이 존재가 일으키는 공포를 끊임없이 추측할 뿐이다. 한달쯤 전 초안 시나리오를 쓰면서 나는 마침내 아들이 아버지를 맞닥뜨리는 순간에 관객도 그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기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사람을 쥐었다 폈다 가지고 놀다가도 아들 앞에서는 유머가 혈관을 타고 싹 빠져나가는 사람. 아아, 백윤식 선생님이 그 신에 들어가 그 얼굴로, 그 목소리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신난다. 그러니 선생님, 어떻게 좀 안될까요?

FROM 감독 남궁선

감독 남궁선은?

1980년생.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진학했다. 지금은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있다. 단편 <세상의 끝>(2007), <최악의 친구들>(2009)을 연출했고,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 스크립터로 참여했다. 그 인연으로 <돈의 맛>에 여검사로 잠깐 출연까지 한다. 현재 단편 작업 중이며, “내가 관객이었을 때 흥미가 가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려 한다. 취약한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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