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과는 거리가 멀고 비교적 흥청망청 돈을 쓰는 편이지만, 큰돈이 드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맥 관련 제품을 하나둘씩 사모으는 게 취미이긴 하지만). 비싼 술집을 가는 일도 없고, 자동차도 팔아버렸고, 카메라나 오디오처럼 정기적으로 목돈이 들어가는 취미도 없다.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나처럼 푼돈을 흥청망청 쓰지는 않겠지. 가랑비에 속옷 젖는 것처럼, 어쩌면 큰돈이 드는 취미를 가진 사람보다 내가 쓰는 돈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뜨끔하다.
제대로 된 오디오를 한번 사보자는 마음으로 용산에 간 적이 있다. 벌써 15년 전 일이다. 그때는 꽤 한가한 시절이어서 수일 동안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수십종의 소리를 들어보았는데, 그 차이를 하나하나 판별해가며 음악을 듣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어떤 소리는 먹먹했고, 어떤 소리는 날카로웠다. 미묘하게 다른 소리들을 구분해가며 내가 어떤 소리를 좋아하는지 판단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그 뒤로, (반은 농담이지만) ‘제일 훌륭한 오디오는 이어폰’이란 얘길 하고 다녔다. 오디오 전문가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 편이 마음 편하다. 적은 돈으로 자주 기기를 교체할 수 있고, 내 맘껏 음량을 조절할 수도 있고, 가지고 다니기도 쉽다. 그동안 사들인 이어폰, 헤드폰이 아마 30종 이상은 될 것이다. 모든 오디오의 소리가 다르듯 모든 이어폰의 소리가 다르다는 게 놀라울 때도 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요즘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가 훨씬 많다. 그때 산 오디오는 구석에 처박혀 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 중 대부분이 좌우에 별로 민감하지 않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목욕탕 슬리퍼처럼 사용한달까, 좌우를 신경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손에 집히는 대로 귀에 꽂는 사람이 많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정교한 소리에는 예민하지 않지만 좌우의 밸런스에는 좀 예민한 편이어서,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 끼면 아무래도 불편하다. 한참 음악을 듣다가 뭔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확인해보면 오른쪽 이어폰이 왼쪽 귀에 꽂혀 있다. 이어폰에는 ‘L’과 ‘R’이 확실히 표시돼 있고, 어떤 이어폰은 좌우의 모양이 다른 경우도 있다.
감긴 이어폰 줄을 풀고 귀에 꽂을 때마다, 두 갈래로 갈리는 이어폰을 볼 때마다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정말 그렇지 않나?). 오늘 소개하고 싶은 그룹이 ‘루싸이트 토끼’라서 억지로 의미를 갖다붙이는 건 절대 아니다. 좌우를 확인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을 때 토끼의 귀와 내 귀를 맞대고 함께 음악을 듣는 장면을 상상하곤 한다. 어째 좀 변태스러운가? 오디오 이야기로 시작해서 루싸이트 토끼로 끝나는 이런 글,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 몇몇 산문은 휴가철을 맞이해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도 한다. 루싸이트 토끼를 참 좋아한다. 모든 앨범이 좋고, 이번 신보도 역시 좋더라. 그러고보니, 휴가철에 어울리는 노래들이기도 하다. 특히 <Go>는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