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씨네21>을 휙휙 넘기다가 ‘주성치 능멸’이라는 표현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누가 감히 우리 성치 교주님을 능멸해?” 하려다가 말고 그걸 쓴 이가 ‘한국의 주성치’를 꿈꾸는 유세윤 감독이라는 걸 알고는 “능멸은 무슨, 숭배겠지” 하며 괜히 배시시 웃는다. 그러곤 거의 공부하는 자세가 되어 유세윤 인터뷰 기사를 꼼꼼하게 읽는다. 역시 남다른 데가 있다. ‘안전제일주의자에 자존심도 별로 없어서 안 미안한 것도 미안하다고 하는데, 그럼 다 풀어진’단다. 킥킥, ‘동북아 루저들의 별’ 주성치를 좋아하는 인간이 대개 다 그렇다. 자존심 없고, 야망 없고, 가망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꼴에 재밌게 살고 싶은 꿈 하나는 아주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챙긴다.
생각해보면 내가 주성치를 만나러 홍콩에 갈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나 역시 야망이 없는 타입이라 상사나 독자가 원하는 톱스타보다는 좀 찌질해 보여도 내가 좋아하는, 만나면 재밌을 것 같은 대상을 주로 인터뷰했는데 주성치가 그 캐릭터의 정점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소림축구>를 만들기 훨씬 전이어서 주성치 하면 여전히 배설물이나 동원해서 유치하게 웃기는 삼류 코미디 배우로 인식될 때였다. 하지만 내게는 달랐다. 그는 코미디라는 가장 쉽고 재미있는 장르를 통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말하는 명배우이며 또 감독이었다. 해석의 충동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며 좀더 순수한 영화적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예술가이기도 하고.
그런데 실제로 만나보니 재밌다기보다는 무척 멋있어서 놀랐다. 소년처럼 맑은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을 결코 감추지 않았고, 쿵후를 사랑하고 ‘어디서든 달릴 수 있는 상태’를 선호하는 사람답게 신사복 차림에도 러닝화를 신고 있었다. 자기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스타일이 곧 영혼이다”라고 했던 장 콕토와 “우리의 겉모양새가 사실상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라는 수전 손택의 선언을 생각나게 하는 진정한 스타일 말이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꿈꾸고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영웅이던 이소룡을 위해 홍콩에 기념관을 짓고 싶다는 꿈과 이제는 잊혀져가는 쿵후의 힘을 보여줄 축구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 그 꿈이 10 년 만에 결실을 맺어 <소림축구>라는 영화가 나온 거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가? 살아 있는, 결국 꿈을 이루는 돈키호테인 셈이니.
취향은 같은 취향의 사람을 끌어당긴다. 마치 자석처럼. 주성치의 가치를 안다는 이유로 유세윤에게 끌린 나는 <씨네21> 가지고는 성에 안 차 그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역시 주성치 못지않게 능청스럽고 뻔뻔하며 기발하면서도 진지한 데가 있다. 주성치가 기존의 영화 문법을 비틀고 자기 스타일로 패러디했듯이, 유세윤도 기존의 주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고 재미나게 잘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엇보다 반갑다. 돈 욕심도 없고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까지 없단다. 이 말 믿어야겠지? 주성치처럼 대박 나진 못할 거라는 예감이 살짝 들면서도, 어저면 이 친구가 홍콩 양아치보다 더 즐거운 인생을 살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 하기야 이젠 시대가 달라졌지. 삶의 질을 위해서든 소소한 행복을 위해서든 성장이라는 주술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는 걸 웬만한 사람은 다 느끼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유세윤은 주성치보다 더 진화한 짬뽕인지도 모르겠다. 왜냐고? 욕심이 없어 자신은 더이상 성장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하면서 삶을 즐기는 청춘이라는 점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