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흉내나 낼라고 병신춤을 췄겄어?” 얼마 전에 타계하신 공옥진 선생의 말씀이다. 아마도 “흉내낼 것이 없어서 장애인을 흉내내느냐?”는 세간의 비난에 대한 항변일 것이다. 듣자하니 선생 자신의 동생이 ‘벙어리’였고, 그 동생이 낳은 딸도 등이 안팎으로 굽은 ‘꼽추’였다고 한다. 평생 그 한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을 선생이 고작 장애인 흉내로 남들을 웃기려고 병신춤을 췄을 리는 없을 거다. 실제로 병신춤은 장애인 ‘흉내’가 아니다.
양반은 병신이다
이 시대에 ‘병신춤’을 보는 것은 편안한 일이 아니다. 언젠가 안동에서 ‘하회별신굿’의 병신춤 장면을 보다가 나 역시 어딘지 불편함을 느꼈다. 그 자리에 있던 외국인 관광객도 다르지 않았을 거다. 문뜩 느낀 바 있어 ‘유튜브’를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누군가가 한국에서 촬영한 ‘병신춤’ 동영상을 올려놓고는 거기에 이런 제목을 붙여 놓았다. ‘장애인을 흉내내는 한국의 혐오스러운 전통.’(Korean hateful tradition mimicking handicappers)
네이버 백과사전은 이 ‘혐오스러운 전통’을 이렇게 설명한다. “서민들은 농악을 치고 춤을 추는 가운데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고 모욕하는 의미에서 이 춤을 추었다. 이 놀이는 밀양지방에서 전해졌으며, 양반을 병신으로 가장하여 양반과 아전들을 풍자하고 모욕함으로써 그간에 쌓인 분노와 한숨을 발산하는 서민들의 오락거리라 할 수 있다. 주로 정월 보름날이나 단오·추석 등에 양반과 마주칠 염려가 없는 다리 밑이나 야외의 숲속에서 즐겼다.”
일각의 오해와 달리 병신춤의 공격대상은 장애인이 아니라 지배계급이었다는 얘기. 하지만 이 설명이 병신춤을 제대로 변호해줄 것 같지는 않다. ‘병신’이라는 말을 ‘욕설’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 모독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이라고 늘 정치적으로 올발랐겠는가? 현대 이전에는 장애인을 욕으로 사용하는 것은 여러 문명에서 매우 흔한 일이었다. 가령 예수마저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며 영적으로 깨이지 못한 것을 장애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병신은 우리다
채희완 교수는 이렇게 푼다. “(병신춤은) 불구자를 단순히 흉내내어 모멸하기 위해서 추는 춤이 결코 아니다. 이는 춤을 출 수 없는 신체적 불구자가 추는 춤이되, 불구에서 정상으로 옮겨내는 싸움의 춤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사회적으로 병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춤이며, 불구화된 것을 불구로써 척결하여 인간의 해방을 성취하고자 하는 춤이다. 춤으로써 가장 인간적인 것이 지상에 실현되는, 지상을 미적 유토피아로 뒤바꾸는 춤인 것이다.”
해석은 이렇게 이어진다. “병신춤은 몸이 성하지 않은 신체장애자의 춤이다. 춤은 살아 있는 것만 춘다. 죽은 것은 춤을 출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춤은 춤을 제대로 출 수 없는 이가 추는 춤이다. 그러기에 춤을 통한 육체해방의 의미가 담겨 있다. 바로 이런 육체해방의 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육체해방의 감흥을 나누며 잠재된 신명을 스스로 돋우게 한다.” 한마디로, 병신춤은 이중의 해방, 즉 인간해방과 육체해방을 위한 춤이라는 얘기다.
조세희 소설 속의 ‘난쟁이’처럼 사실 우리 모두는 “사회적으로 병신”이다. 그 병신들이 병신춤을 통해 춤도 못 추던 불구의 상태에서 벗어나 비로소 육체의 해방을 만끽하고, 그로써 한때의 병신들은 더이상 병신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의 바탕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민중주의 이념을 읽을 수 있다. 채희완에게서 ‘병신춤’은 각성되지 않은 ‘즉자적’ 민중을 정치적으로 각성된 ‘대자적’ 민중으로 바꾸어놓는 해방의 기획을 상징한다.
‘우리 모두가 병신’이라는 채회완의 해석은 요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병신춤을 장애인 흉내내기로 비난하는 편견이나, 그것을 양반계급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나 모두 병신춤을 일종의 ‘벌레스크’(burlesque), 즉 타인을 조롱하는 저급한 익살극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병신춤이 ‘우리 모두가 병신’이 되는 춤이라면, 거기에는 조롱하는 주체도, 조롱당하는 객체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조롱 자체가 아예 성립할 수 없다.
병신춤은 ‘흉내내기’가 아니다. ‘모방’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는 원래 존재론적 닮기, 즉 카멜레온이 환경에 따라 제 몸의 색깔을 바꾸듯이 무언가와 동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훗날 라틴어(‘imitatio’)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모방’은 인식론적 재현, 즉 어떤 것을 그저 연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병신춤은 이미타티오, 즉 병신을 조롱하기(mockery) 위한 흉내내기(mimicry)가 아니라, 병신의 미메시스, 즉 ‘병신-되기’다.
공옥진의 경우는 더 그러하다. 그의 병신춤은 양반을 풍자하기 위한 게 아니다. 그는 스스로 병신, 아니 병신으로 사는 한(恨)의 덩어리가 되려 한 것이다. 그의 동물춤도 조롱을 위한 흉내내기와는 거리가 멀다. 외려 그는 동물-되기로써 철창에 갇힌 원숭이의 고통을 제 것으로 끌어안으려 했다. 들뢰즈의 말대로, “그것은 근본적 동일화며, 모든 감정적인 동화보다 훨씬 깊은 비구분의 영역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이다.”
정치학에서 우주론으로
탈춤을 지배계급에 대한 ‘풍자’로 보는 해석은 과연 옳은가? 80년대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전통연희에 대한 민중주의적 해석은 피할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풍자’라는 형식은 어디까지나 근대적 정치의식(‘계급의식’)의 산물. 따라서 탈춤을 ‘풍자’로 해석하는 것은 근대적 시각을 근대 이전의 문화에 투사하는 시대착오일지도 모른다. 서양 중세의 카니발에도 교황과 황제에 대한 조롱과 욕설은 난무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았다.
탈춤 속에 등장하는 양반에 대한 야유는 근대의 풍자보다는 중세의 카니발에 가깝다. 카니발 속의 희롱과 조롱과 우롱은 사회의 위계와 질서를 집단적 웃음으로 폭파해버림으로써 모든 인간을 잠시나마 문명이 시작되기 전의 원초적 평등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준다. 탈춤의 웃음 역시 정치학이 아니라 차라리 우주론에 속하는 현상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듯이, 이 우주론적 웃음 앞에서도 모든 인간은 또 한번 평등하다.
병신춤도 다르지 않다. 병신-되기는 우리를 ‘장애/비장애’의 구별이 생기기 전의 원초적 평등의 상태로 되돌리고, 동물-되기는 우리를 ‘인간/동물’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태고의 상태로 되돌린다. 장애와 비장애의 구별이 없는 곳에서 모든 인간은 저마다 한(恨)덩어리이며, 동물과 인간이 구별되지 않은 곳에서 모든 생명은 저마다 ‘고통’ 받는 살(肉)덩어리다. 그런 의미에서 병신-되기, 동물-되기는 동시에 한-되기, 살-되기라 할 수 있다.
병신춤에서 우리는 고통으로 경련하는 한 많은 신체의 히스테리를 본다. 격렬한 신체의 발작을 통한 카타르시스. 이것이 병신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해방’이다. 병신의 표정과 몸짓을 보며 터뜨리는 웃음은 정치학이 아니라 우주론의 영역에 속한다. 거기에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댈 일이 아니다. 이제 선생의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내가 흉내나 낼라고 병신춤을 췄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