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개미굴은 다이달로스의 미궁 못지않게 정교하며, 비버의 댐은 인간이 지은 교량 못지않게 복잡하다. 반복되는 육각형의 벌집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구조물 못지않게 튼튼하다. 동물의 건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새의 둥지가 아닐까? ‘둥지’라고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새의 종류만큼 다양하여, 그것들만 따로 모아놓아도 그 어떤 전시회보다 풍성한 컬렉션을 자랑할 것이다.
정초주의 vs 구성주의
철학의 은유로 가장 선호되는 이미지가 바로 ‘건축’이다. 건축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작업은 역시 사유의 토대를 놓는 일이다. 이렇게 인간의 지식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토대 위에 올려놓으려 하는 욕망은 특히 근대 이후에 뚜렷해지는데, 이런 경향을 철학에서는 ‘정초주의’(foundationism)라 부른다. 이 시기에 나온 철학서들의 제목에 ‘기초’(foundation)라는 낱말이 사용되는 것도 이 정초주의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을 더이상 의심할 수 없는 토대 위에 세우기 위에 이제까지 배운 모든 지식에 괄호를 치는 ‘방법적 회의’를 수행했다. 이것이 근대 철학의 토대를 놓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현대에 들어와도 정초주의의 시도는 포기되지 않았다. 가령 독일의 철학자 후설(Husserl)은 데카르트처럼 자신의 현상학을 ‘엄밀한 학’으로 만들기 위해 ‘판단중지’(epochè)를 통해 ‘사상 자체로’(zur Sache selbst) 돌아가자고 외쳤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우리의 지식에 확고한 토대가 있다는 생각은 급격히 도전을 받기 시작한다. 가령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세계의 상태가 달라진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관찰에 의해 존재 자체가 변화한다면, 근대 철학이 추구했던 인식의 이상, 즉 주관으로부터 독립한 (세계의) 객관적 인식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가 될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사유에 ‘토대’의 역할을 해줄 든든한 지반이 존재한다고 믿는 철학자는 거의 없다.
‘토대’는 ‘발견’되는 게 아니라 ‘구성’되는 게 아닐까? 이미 18세기에 칸트는 우리의 세계상이 실은 우리의 주관이 구성해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를 철학에서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라 부른다. 칸트에 따르면, 물 자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인식하는 한의 세계는 이미 우리 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주관의 형식이다.
물론 칸트가 이로써 인식의 상대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주관’은 개개인의 주관이 아니라, 인류보편의 정신능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가 비록 우리의 주관에 의해 구성된다 할지라도, 그 세계상은 우리 모두에 대해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후기 비트겐슈타인, 후기 후설과 하이데거도 세계의 구성적 성격을 강조하나, 그 구성은 ‘삶의 형식’이나 ‘생활세계’를 반영한 것이어서 마냥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니체의 구성주의는 이들의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진리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라 믿기에, 그는 사유에 굳이 토대가 있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에게 토대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의 예술. 즉 건축이 참신하고 아름답기만 하다면, 굳이 그 건물의 대지에 등기가 되어 있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얘기다. 또다시 은유를 동원하여 시각적으로 요약하자면, 니체에게 철학이란 토대 없이, 닻도 없이 이리저리 물위를 떠도는 건축물이다.
그럼에도, 둥지가 절실하다
철학자 박이문 선생은 철학을 ‘둥지’에 비유한다. 철학을 대지에 뿌리박은 건축에 비유하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다. 그리하여 니체는 철학을 물위를 떠도는 유동적 건축에 비유했다. ‘둥지의 철학’은 이 세빛둥둥섬의 이미지를 대체할 새로운 은유를 제시한다. 둥지는 풀숲이나 나무에 기대어 지어진다. 하지만 거기엔 토대가 없다. 그래서 새들은 필요할 경우 둥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다른 곳에 다시 둥지를 튼다. 철학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둥지를 지을 때 새들은 이곳저곳에서 재료를 모아온다. 대부분의 새들은 마른 풀잎이나 지푸라기, 혹은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둥지를 지으나, 새들 중에는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물건은 보는 대로 물어오는 예술가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료 자체가 아니라, 그 재료들을 정교하게 엮어나가는 새들의 솜씨다. 철학의 작업도 다르지 않다. 철학이란 사유의 건축에 사용될 재료를 이곳저곳에서 물어다가 정교하게 구축해나가는 지적 건축의 작업이다.
둥지의 기능은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데 있다. 철학도 다르지 않다. 철학은 파스칼이 말한 “저 무한한 침묵의 공간”(우주), 그 광대한 세계가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고독한 인간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불렀던가? 집의 은유를 사용하자면, 철학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집’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둥지의 철학’은 세계관 공백의 시기에 다시 세계관을 회복하자는 노(老)철학자의 요청이라 할 수 있다.
‘둥지의 철학’ 자체도 둥지처럼 만들어졌다. 가령 박이문 선생이 말하는 ‘둥지’의 이미지는 이른바 ‘존재-의미론적 매트릭스’(onto-semantic matrix)의 은유다. 한마디로 세계란 인간에 의해 언어적으로 구성되는 매트릭스라는 얘기다. 이는 물론 세계가 주관의 구성물이라는 칸트의 구성주의,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언어철학, 세계가 일종의 매트릭스, 즉 프로그램이라는 보드리야르의 사상으로 엮은 사유의 구성물이다.
‘둥지의 철학’이 아직은 하나의 은유에 불과하다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철학에서 사실 은유와 개념의 구별은 그렇게 분명한 게 아니다. 가령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의 용어는 개념인가? 아니면 은유인가? 게다가 박이문 선생은 철학자이자 동시에 시인이다. 그에게는 시가 곧 철학, 즉 존재론이자 인식론이다. 그 때문에 “둥지의 철학은 개념적, 논리적, 기하학적 사유에 앞서 지각적, 감각적, 미학적, 은유적, 신적 언어를 선호한다”.
철학의 ‘둥지’는 수많은 나뭇가지들로 복잡하게 엮은 정교한 구축물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재료들 하나하나가 어디서 유래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둥지에는 저 멀리 스피노자에게서 물고 온 가지가 있는가 하면, 가장 최근의 윤리학과 심리철학에서 물고 온 가지도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 한마디로 그 재료들을 어떤 모양으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엮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재료들의 방대함은 거의 ‘세상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겠다’는 헤겔의 욕망을 연상시킨다. 모두들 철학 자체의 효용성을 의심하는 시대에, 누구도 세계관의 공백을 불편으로 느끼지 않는 시대에, 과거와 현재의 재료들을 엮어 다시 세계상을 제시하겠다는 야심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둥지 없이 살았다. 새들에게 숲속에서 몸을 누일 ‘둥지’가 필요하듯이, 인간에게도 세계 속에서 마음을 누일 ‘둥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