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잘린 미시마 유키오의 신체는 ‘아세팔’을 연상시킨다. ‘아세팔’은 ‘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아케팔로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르주 바타유가 결성한 비밀결사의 이름이자, 이 단체에서 발행한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앙드레 마송이 만든 잡지의 표지에는 머리가 잘린 사내가 그려져 있다. 사내는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심장을 든 채 서 있다. 사내의 배는 해부된 시체처럼 내장을 드러내 보인다.
아세팔,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죽음의 충동
마송의 그림은 다소 섬뜩한 방식으로 다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을 반복하고 있다.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은 완전한 도형(원과 정사각형) 안에 담긴 완벽한 인체비례로 르네상스의 인간적 이상을 표현한다. 방향은 뒤집혔지만 ‘아세팔’ 역시 바타유 그룹의 욕망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 신적 완성을 향해 상승하는 에로스의 충동을 대표한다면, ‘아세팔’은 죽어서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죽음의 충동을 암시한다.
바타유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류한 뒤에 앙드레 브르통과 갈등을 빚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무엇보다도 프로이트의 ‘쾌락원리’와 연결시켰다. ‘문명에 억압된 성욕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라는 것이 브르통을 따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하지만 바타유에게 에로티즘의 정수는 초기 프로이트의 ‘쾌락원리’가 아니라 후기 프로이트의 ‘죽음의 충동’(Todestrieb)에 있었다.
물론 브르통 자신도 초현실주의적 취향- 가령 ‘섬뜩한 것’(uncanny)에 대한 선호- 의 바탕에 죽음의 충동이 깔려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 그의 정치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문명에 억압된 삶을 회복하는 데 있었기에, 그 운동이 고작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결론을 그로서는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브르통이 흠칫 놀라 멈춰 선 지점에서 바타유는 용감하게 ‘죽음의 충동’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필사적 차원의 에로티즘
<에로스의 눈물>에서 바타유는 “작은 죽음과 결정적 죽음의 동일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은 죽음’(petit mort), 즉 성적 결합의 정점에 숨이 멎는 듯한 그 경련을 바타유는 “궁극적 죽음의 맛보기”라 부른다. 오르가슴이란 결국 작은 죽음의 형태로 궁극적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에 불과하다. 에로티즘은 이렇게 죽음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기에 바타유는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동물에게는 성적 활동은 있어도 에로티즘은 없다고 단언한다.
“동물, 심지어 관능이 극도로 고조되는 원숭이조차 에로티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에로티즘을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죽음의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극단적 차원의 에로티즘, 필사적 차원의 에로티즘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죽음의 암울한 전망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타유가 말하는 “극단적 차원의 에로티즘, 필사적 차원의 에로티즘”은 아마 사도-마조히즘을 가리킬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죽음의 충동과 연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이 죽음본능의 일부는 그것이 외부를 향해 이동할 때 사디즘에 이르게 된다. 이 이동을 따르지 않는 다른 일부는 유기체 내에 머무는데, 이 유기체 내에서 그 다른 일부는 리비도적으로 연결된다. (…) 우리는 여기서 본래적 의미의 마조히즘, 즉 성애적 마조히즘을 본다.”
<에로스의 눈물>은 중국의 백각형(百刻刑)에 관한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렝체’(凌遲)라 불리는 이 형벌은 마치 회를 뜨듯이 범죄자의 신체를 오랜 시간에 걸쳐 잘라내는 것으로, 주로 반역죄나 존속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 대상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 형벌의 핵심은 ‘산을 천천히 오르다’라는 말뜻에 어울리게끔 처형의 시간을 되도록 길게 연장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과도한 고통으로 범죄자가 실신하지 않도록 종종 마약을 투여했다고 한다.
바타유가 소개하는 사진 속의 범죄자는 가슴살을 도려내 갈비뼈가 드러난 상태에서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마약의 효과일까? 그는 극단적 고통을 최고의 열락으로 체험하는 듯하다. ‘맛보기’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궁극적 죽음에 수반되는 오르가슴은 대체 어떤 것일까? “돌연 내 눈에 비치고 나를 고뇌 속에 가두었던 것, 하지만 동시에 고뇌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던 것은 극단적 공포와 신성한 황홀이라는 이 완전한 대립항들의 동일성이었다.”
잔혹한 처형은 혐오스럽다(repulsive). 하지만 구경꾼들은 그 잔혹함에 강박적으로 끌린다(compulsive). 이 은밀한 매혹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매력은 아마도 우리의 삶을 구조화하는 금령들을 위반하는 데서 나올 것이다. 한때 우리는 죽음, 즉 무기물이었다. 하지만 문명 속에서 그 사실은 망각되고 억압된다. 일상에서 잔혹한 짓을 하는 것이나 보는 것은 금지된다. 하지만 공개처형은 성스러운 국가의 이름으로 그 금지된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죽음 속에서 성(聖)과 성(性)이 하나로
바타유는 ‘성스럽다’(sacrè)는 말과 ‘공희’(sacrifice)라는 말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신성한! 애당초 이 낱말의 구성음절들은 고뇌로 가득 차 있고, 이 음절들에 짐지워진 무게는 공희에 있어 죽음의 무게 바로 그것이다.” 원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인간아이를 찢어 죽이거나, 혹은 새끼 염소를 물어뜯어 죽이는 잔혹극이 벌어지곤 했다. 인신공희나 그것을 대체한 희생양 제의의 끔찍한 폭력과 무서운 죽음 속에서 성(聖)과 성(性)은 하나가 된다.
이렇게 종교와 에로티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맞붙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현대문명의 개인화된 에로티즘은, 바로 그 개인적 특성 때문에 종교에 연결되는 요소를 더이상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혹시 미시마 유키오에게 결핍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 에로티즘의 성스러운 차원이 아니었을까? 그에게서 종교를 대신한 것은 국가. 순국(殉國)의 한갓된 형식 속에서 그는 “극단적 공포와 신성한 황홀”의 동일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바타유의 비밀결사 ‘아세팔’의 성원들은 기꺼이 제의적 희생양이 되는 데에 동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희생양이 될지언정 그 누구도 집행자가 되려 하지는 않았다. 보상금까지 내걸었지만, 끝내 그들의 목숨을 끊어줄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고.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아세팔’은 사디스트가 빠진 마조히스트 집단, 아니면 이론과 실천의 차이,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명확히 의식하는 현실주의자 집단이었을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방패회’(楯の) 는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 할복을 할 준비만이 아니라 기꺼이 동료의 머리를 자를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다. 성(죽음충동)과 폭력(할복과 참수)과 세속종교(국가주의 이념). 미시마의 작품은 그러잖아도 이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맴돈다. 삶에서도 그는 스스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부활을 위한 희생양(sacrifice)이 됨으로써 극단적 공포와 결합된 성스런(sacrè) 황홀을 맛보려 했다.
에로티즘의 성스러움을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미시마야말로 바타유보다 더 바타유적인지도 모른다. 바타유의 아세팔은 마송의 그림이지만, 미시마의 아세팔은 그의 신체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