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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올해의 나쁜 남자

SBS 드라마 <추적자> 강동윤의 어떤 절실함

“그들이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음이 틀림없어.” SBS <추적자>의 방송 일주일 전, 신작 드라마에 대한 기획 회의에서 나는 자못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물론 아는 구석은 개뿔도 없었지만, 어쨌든 뭔가 있어 보였다. 시청률 20%를 넘나드는 MBC <빛과 그림자>가 1위를 굳게 지키고 있고, KBS는 <최고의 사랑>의 홍정은-홍미란 작가에 로맨틱코미디의 황태자 공유는 물론 첫사랑 아이콘 수지까지 캐스팅한 <빅>을 들고 나오는 마당에 마흔을 훌쩍 넘긴 손현주-김상중 투톱의 드라마라니. 같은 40대라도 주말의 F4, SBS <신사의 품격> 미중년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나. 물론 연기신용등급으로는 별 다섯개가 모자라지 않은 배우들이지만, 수출용 기획드라마와 흥행용 무리수 캐스팅이 날로 판치는 마당에 연기력만 믿고 이 ‘아저씨’ 드라마를 편성할 수는 없었을 테니 아무래도 그것만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정말 뭔가 있었다. 사랑하는 딸을 교통사고로 잃은 백홍석(손현주)이, 그 죽음을 사주한 유력 대권주자 강동윤(김상중)에 맞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는 어쩐지 안 참신한 설정 안에 예상을 뛰어넘는 힘이 있었다. 시작부터 법정에 난입해 뺑소니범 한류스타 PK준(이용우)에게 총을 겨누는 백홍석은 손현주가 무수히 연기해온 평범한 아버지들을 응축한 것 같은 에너지를 보였고, 딸에 이어 아내와 집까지 잃고 권총 한 자루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숨이 끊어지도록 달리는 부정의 드라마는 탄탄한 캐릭터와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사이에서 그동안 등장한 그 어떤 장르 드라마보다 팽팽한 긴장감을 갖는다. 그 와중에 조 형사(박효주)와 건달 용식이(조재윤)의 깨알 같은 러브라인은 물론, 아주 오랜만에 나를 진심으로 설레게 한 드라마 속 남자 캐릭터인 최정우(류승수) 검사의 무뚝뚝한 매력까지. SBS가 ‘믿는 구석’은 작가의 힘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백홍석이 진실에 가까워졌다 뒤통수를 맞았다를 몇 차례 반복하는 사이 내가 얻은 딜레마는 백홍석 못지않게 그의 적 강동윤을 응원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장에서 일하던 누이를 사고로 잃고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배상금으로 등록금을 내야 했던 그가 명문대를 졸업하고 굴지의 재벌 서 회장(박근형)의 딸 서지수(김성령)와 결혼한 뒤 국회의원 3선을 거쳐 대선까지 도전하는 입지전적 감동 스토리(!) 때문은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홀로 열심히 노력해 성공하였다는 미담하에 각종 꼰대질과 국가적 삽질을 일삼는 정치인은 사실 지금도 차고 넘친다. 다만 유능한 사위는 ‘마름’으로 취급하며 무능한 아들에게 자신의 왕국을 물려주기 위해 정계와 법조계, 재계를 전화 한통으로 주무르는 서 회장의 끝없는 욕심이 강동윤의 권력에 대한 절실함을 이해하게 만든다. 대한민국 재벌의 탄생과 확장, 일상과도 같은 탈법을 넘어 이제는 초법적인 권력이 된 그들의 역사를 놀라울 만큼 예리하게 짚어낸 대본 때문이다.

특히 “강원도 촌놈이 의대 합격했을 땐 세상이 내 맘대로 될 것 같았다”던 백홍석의 친구 창민(최준용)이 의료사고로 빚더미에 앉은 뒤 도박에 빠져 30억원에 친구 딸의 목숨을 팔고, ‘하버드며 스탠퍼드를 거쳐 미국에서 상하원, 대선까지 치러본 재원’이 계좌에서 50억원 정도 사라져도 신경쓰지 않는 서지수의 명에 따라 커피를 타고 초등학생 숙제를 돕도록 마구 부려지는 광경에서 <추적자>는 ‘슈퍼 갑’으로 태어나지 못한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범접할 수 없는 세계가 만들어졌음을 잔혹하리만큼 깔끔하게 눈앞에 펼쳐놓는다. 그래서 논현동 호스트바에서 T/C 7만원 받던 PK준의 ‘코리안 드림’은 끝났지만 강동윤의 불의하지만 처절한 꿈이 서 회장의 발 아래 스러져버리는 모습은 어쩐지 보고 싶지 않다. MBC <하얀 거탑>에서 성공을 향해 몸부림치다 추락하고 만 장준혁(김명민) 이후 이런 악역은 처음이다. 강동윤, 이 올해의 나쁜 남자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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