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에 관해 검색하다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사진 속의 그는 이마에 ‘칠생보국’(七生報l國)이라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일곱번 태어나도 조국에 보답하겠다는 뜻이리라. 지그시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사진 속의 미시마, 더 정확히 말하면 미시마의 잘려나간 머리가 놓인 받침대에는 ‘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그것으로 보아, 아마 경찰에서 증거물로 촬영한 사진인 모양이다.
냉소를 낳은 엽기 쿠데타
1970년 11월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이 조직한 사병조직 ‘방패회’(楯の) 멤버들과 함께 도쿄에 있는 자위대 사령부에 난입한다. 자위대 간부를 인질로 잡은 뒤, 그들은 인질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자위대 병사들을 모아달라는 요구를 한다. 요구대로 병사들이 모이자, 그는 난간 위로 올라가 건물 앞의 병사들을 향해 쿠데타로 천황제를 부활시키자고 선동한다. 이 황당한 요구에 자위대 병사들은 그저 야유와 냉소와 모욕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거의 들리지도 않았을 몇분의 연설을 마친 뒤 미시마는 건물 안으로 되돌아가 할복을 감행한다. 가이샤쿠닌(介錯人, 할복할 때 칼로 목을 쳐주는 사람)의 역할을 맡은 것은 모리타 마사가쓰(森田必勝). 하지만 다섯번을 내리쳐도 미시마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의무 수행에 실패한 모리타가 고가 히로야스(古賀浩靖)에게 칼을 넘겨준다. 그의 손에 미시마의 목이 떨어지자, 모리타 역시 미시마의 뒤를 따라 제 배를 가른다. 고가가 다시 한번 할복자의 목을 베어 고통을 멈추어준다.
극적인 자살을 연출함으로써 일본사회를 감동시키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사건을 접한 일본 시민들의 태도는 건물 아래서 야유를 퍼붓던 자위대 병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건 직후에 이루어진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 갑작스런 사무라이 문화의 복고에 이해와 공감을 표한 국민은 3%가량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의 자살을 ‘순국’이 아니라 ‘엽기’로, 말하자면 시대착오적인 마카브르 퍼포먼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섹스
미시마는 자신이 출연하거나 연출한 영화에서 이미 몇 차례 할복을 연출한 바 있다. 그의 할복은 이 영화적 사건을 현실로 연장시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현실의 비루한 자아는 거울(=영화)에 비친 완벽한 자아, 자아의 이상에 도달한다. 그가 보디빌딩에 집착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삐쩍 마른 몸으로 할복을 하면 ‘간지’가 나겠는가? 배우는 출연을 위해 몸을 만들기도 하지 않던가.
영화 <우국>에서 주인공 다케야마 신지로 분한 미시마는 아내 레이코와 격정적인 섹스를 마친 뒤 극적인 할복 장면을 연출한다. 가장 절박한 섹스에 이어지는 가장 완벽한 죽음. 이 우익 로망스 속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하나가 된다. 그의 죽음이 성적 욕망, 특히 ‘죽음의 충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던 (전시의)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정신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을 성 세바스찬으로 연출한 사진은 그의 할복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기둥에 묶여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이 순교자의 도상이 어린 시절에 자신을 성적으로 흥분시켰다고 한다. 이 사진은 그가 가타나를 든 사무라이로 나오는 또 다른 사진과 함께 미시마의 사도마조히즘을 보여준다. 가타나로 베는 가학성과 화살에 찔리는 피학성. 그의 할복은 서로 대립되는 듯이 보이는 두 성욕의 교차로 볼 수 있을 거다.
미시마의 실존적 딜레마
그의 죽음의 성적 동기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승화’시키는 독특한 방법이리라.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생사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릴케가 쓴 것처럼 현대인은 낭만적으로 죽을 수가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병이나 교통사고 따위로 죽는다. 거기에는 드라마라곤 없다. 생의 권태랄까.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죽을 만큼 강하지 않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상이나 대의 같은 게 필요하다.”
미시마에게는 죽음을 향한 자신의 성적 충동을 포장할 어떤 가치가 필요했다. 그는 “뭔가 명예로운 것을 위해, 어떤 대의를 위해 죽기를 원하나”, 이미 전후 일본사회는 “대의를 위한 의미있는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미 서구화한 일본에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개인의 감동적 드라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낭만적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운문적 죽음을 연출해야 한다는 게 미시마의 가장 큰 실존적 문제였다.
‘내용’이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형식’만의 ‘순국’(殉國)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시마의 자살은 철저히 유미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윤리적 곤궁에 처할 때마다 미학적 해결을 찾는 게 일본 문화다. 미시마의 자살은 일본 특유의 유미주의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지극히 사적인 충동을 검열을 피해 ‘우국’과 같은 대의명분에 감추어 발산한 것은 실은 그다지 영웅적이지 못한 것이다.
기사도와 무사도
어느 인터뷰에서 미시마는 일본이 항복하던 1945년 8월15일 여름날의 “이상한 느낌”에 대해 얘기한다. 신으로 알았던 천황이 스스로 인간을 자처하고, 일본이라는 국가를 지탱해주던 체제가 무너졌지만,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그 여름날의 이상한 느낌이 뒤에 할복으로까지 이어지는 그의 삶의 출발점이었다. 그날 무엇이 바뀌었는가? 일본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었던 국가의 로망스가 무너진 것이다.
미시마가 처한 상황은 일찍이 17세기에 돈키호테가 당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냉철한 이성주의와 냉혹한 이해관계의 시대에 ‘기사도’의 이상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돈키호테는 임종의 자리에서 눈물 흘리며 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미시마는 대의와 명예를 제 배를 가름으로써 이 산문적 사회에 다시 ‘무사도’의 운문성을 도입하려 한다.
돈키호테가 기사문학을 현실로 알고 살아갔다면, 미시마는 ‘하가쿠레’(葉隱)라 불리는 무사도 서적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라 할 수 있는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 역시 할복을 금지한 주군의 명령에 따라 사무라이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이미 18세기에 그러했으니, 20세기에 그 기회를 잡기가 쉽겠는가. 결국 그는 죽을 기회를 잡기 위해 할복의 맥락을 인위적으로 연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시마는 결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의 특정한 방식, 가령 암에 걸려 죽는 것이었다. 그에게 대의가 필요한 것은, 미시마 자신이 인정하듯이, 그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죽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기는 할복으로 삶의 산문성, 즉 생의 권태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그 권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영웅적인 것이다.
산문 시대의 영웅은, 구차하게 대의나 명분 같은 거 걸지 않고 깔끔하게 죽는다. 죽음에 굳이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