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백지영이 데이트 비용을 전부 자기보다 경제력이 허약한 9살 연하 애인 정석원에게 내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더 잘 버는 자기가 낼 수도 있지만, “버릇 들이면 안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단 한번도 안 냈다나? 오, 놀랍다. 이것이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더 빡세게 새끼를 훈련시키는 어미 사자의 교육법이다. 그런데 웃기는 건 그게 남자 기를 살려주고, 남자를 더 남자답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처사 아니겠냐고 은근 두둔하는 여자들의 반응이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마음에 맞는 여자 셋, 남자 둘이 모여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번에도 술값을 B가 냈다. 엥 또? 왠지 찜찜하다. 회사에 와서 그 얘기를 했더니 후배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냥 놔둬요, 걘 후배지만 남자잖아요. 전 그래서 B가 좋은걸요. 걘 자기 애인이 아니래도 여자한테 돈을 쓰게 하지 않아요. 이번엔 내가 내겠다고 하면 막 화를 내는데, 아직도 그런 전통적인 규칙을 따르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전 무척이나 즐거워요.”
혹시 이런 마음 아는지 모르겠다.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낸다’와 같은 전통적인 규칙들을 단 한번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적이 없는데, 그런 내가 때때로 경제적으로 자립한 추녀처럼 느껴지는 거. 예전에 한 미녀 작가에게 이런 요지의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데이트 신청은 남자가 하는 거고 플랜도 남자가 짜고 비용도 남자가 낸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 정도는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여자인 나는 최대한 예쁘게 꾸미고 나간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어 그래? 처음엔 약간 기가 막혔다. 쟤, 아티스트 맞아? 전통적인 규칙이나 구태의연한 인습에 도전하는 게 아티스트 아닌가? 이상한 건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괜히 기가 죽는다는 거다. 왜 난 한번도 저런 깜찍한 생각을 못해봤지? 역시 미인이 아니라서? 돈을 내시오, 하고 명령할 수 있는 권리는 미인한테만 주어지는데 나한테는 쥐뿔도 그런 게 없는 거다. “체, 할 수 없지. 없는 걸 어떡해? 있는 거라도 내야지, 돈.”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읽으며 키득거릴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녀는 맛이 썼다. 그래서 욕설을 퍼부어주었다.”
언제부터인가 남자들이 비 맞은 복슬개처럼 불쌍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여자들이 스스로 사냥에 나서는 능동적인 욕망의 맹수로 변모하면서 전통적인 사회에서 남자들이 누리던 권리가 대부분 해체됐다. 덕분에 과거처럼 힘이 아니라 여자들처럼 자신의 육체적 매력에 호소하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가 탄생했고. 그래서 다들 난리다. 몸을 관리하고 신경 써서 옷을 입는다고. 그런데도 여전히 남자는 데이트 비용을 내고, 결혼하려면 집을 사야 하고, 돈을 벌어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란다, 제기랄. 하지만 남자가 아니면 또 어떤가? 남자라고 큰소리칠 수 있어서 행복한 시대는 다 지났는데 그까이 거 반납해버리는 거다. 남자 행세 해봤자 의무만 많아지고 걸핏하면 사고치기 일쑤다. 그러니까 남자다운 남자 따위 다 그만두자. 아름다움을 무릎에 앉히고 싶은 욕망도 야수들한테 줘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