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Monde Sans Pitie 1989년, 감독 에릭 로샹 출연 이폴리트 지라르도 <EBS> 1월26일(토) 밤 10시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어느 소설의 문장을 빌리자면, <동정없는 세상>은 불완전함을 지향하는 영화다. 여기엔 너무나 근사하게 빼입고 다니는 남자가 나온다. 머리카락엔 늘 힘이 들어가 있고 고물이지만 자동차도 끌고 다닌다. 뭔가 평범하진 않다. 백수에, 목표의식이 없고, 희망사항도 없다. 한심하게도 고등학생인 동생이 학교에서 마약을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오로지 무(無)로 일관하는 인생이다.
그런데 이 남자가 한번 입을 열면 상황이 달라진다. 낮이나 밤이나 사랑타령에, 으슥한 파리 밤길엔 영혼들이 걸어다니고 그들이 입을 맞춘다는 등 즉흥적으로 시를 읊고 다닌다. “도대체 사랑을 빼면 남는 게 뭐 있어? 우릴 기다리는 게 뭐가 있겠어? 아.무.것.도.없.어.” <동정없는 세상>은 지극히 낙천적으로 젊음의 오만방자함을 있는 힘껏 찬미하는 영화다.
파리에서 생활하는 대학 중퇴생 이포. 그는 마약딜러인 동생에게 얹혀사는 처지다. 때로 도박판을 벌이고 절묘한 말솜씨로 여자를 유혹하는 게 생활 전부다. 이포는 동시통역사인 나탈리라는 여성을 우연히 만난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그는 나탈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 나탈리는 이포의 엉뚱하면서 한편으로 불안정한 삶이 못마땅하고, 이포는 그런 나탈리의 태도가 싫다. 미국에서 강의제안이 들어오자 나탈리는 이포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하지만 그는 단칼에 제의를 거절한다.
<동정없는 세상>의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 않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멋대로 해라>(1960)처럼 무분별한 삶을 사는 남성, 그리고 인텔리 여성의 사랑을 엮어간다. 하지만 영화는 누벨바그의 영향을 드러내지 않고, 엄밀하게 보면 1980년대 프랑스영화의 흐름에서도 한발 비켜서 있다. 이른바 ‘누벨 이마주’라고 불리던 작위성의 영화들과도 거리를 둔다. <동정없는 세상>은 오로지 캐릭터와 대사의 힘에 의존해 당대 청춘의 일상을 위트있는 방식으로 스케치한다. 독특한 작가정신이 엿보인다고 하긴 힘들지만 영화가 동시대 젊음들에 던지는 ‘공감’의 호소문은 유례없이 격하다. 그리고 뼈저리다. 무기력하고 자폐적인 태도로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때로 사랑의 열병을 앓고, 터무니없는 꿈과 몽상에 빠지곤 하는 청춘의 이야기인 것이다.
<동정없는 세상>은 에릭 로샹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 영화 한편으로 에릭 로샹 감독은 “형편없는 사기꾼”이라는 비난과 “위대한 시인 랭보의 재래”라는 황송한 찬사를 동시에 들었다. 초기부터 지나치게 찬반양론에 휩싸인 탓일까? 감독의 이후 작업들인 <세상의 눈>(1991)과 <애국자들>(1993) 등은 전작에 훨씬 못 미치는 반응을 얻었다. 어찌됐든 에릭 로샹 감독은 <동정없는 세상> 한편으로 단명해버린 연출자라는 인상을 아직까지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참고로 각본 크레디트엔 에릭 로샹과 영화학교 동기이자 영화감독인 아르노 데플레생이 나란히 올라 있기도 하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