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3박4일간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아침 10시 반 킹스크로스역에서 출발하는 에든버러행 이스트코스트라인 급행열차에 오르자 어김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심을 빠져나와 외곽으로 접어들면서 빗줄기는 안개로 바뀌었다. 창밖에는 2차대전 직후 도시로 몰려들던 시골 출신 노동자들을 위한 영국식 조립주택들이 수십개씩 무리지어 나타났다 사라졌다. 저 골목들 사이로 마이크 리와 켄 로치 영화의 좌절한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비웃을 가장 적절한 말을 고르기 위해 애쓰며 궐련을 씹어대고 있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는 듯도 했다.
오랜 공업도시인 요크와 뉴캐슬을 지나 얼마를 더 가자 오른쪽으로 시퍼렇게 굽이치는 북해가 나타났다. 뿌연 비안개 속에 스코틀랜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든버러에 도착하자 하늘은 맑게 갰다. 개찰구를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나도 모르게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수백년은 족히 된 것 같은 세월의 검은 더께를 어깨에 인 중세 건물들이 지평선 끝까지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샅샅이 눈에 담아주리라 이를 갈면서 예약해두었던 싸구려 백패커스로 향했다. 하루에 16파운드짜리 4인실에 짐을 풀고 무작정 거리로 나왔다. 뜻모를 폭풍 같은 질투에 시달리며 밤늦도록 고풍스런 성곽과 교회와 갤러리와 거리 곳곳을 쏘다니고 어둠이 찾아들면 펍에 나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구수한 억양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마지막 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하이랜드로 출발했다. 버스 운전사 아저씨의 걸쭉한 농담을 들으며 한참을 빗속을 달리다보니 투명한 호수와 시원하게 솟아 있는 푸른 산, 그 아래 넓게 펼쳐진 목초지에 소와 말과 양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그야말로 이발소 그림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이곳이 정말 <트레인스포팅>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쓰레기 친구들과 하이랜드로 여행을 갔다가 갑자기 주저앉아 스코티시로 살아가다는 게 얼마나 개 같은 일인지 씨부렁거리던 그곳이란 말인가? 나 같으면 비스코티시로 태어나 이제야 이런 풍경을 보게 된 게 얼마나 개 같은 경우인지 애통해하겠구먼.
괴물 네시가 산다는 네스 호수 주변에서 버스가 멈추고 관광객이 1시간짜리 크루즈를 하러 선착장으로 몰려갔다. 나는 크루즈를 포기하고 카페에 앉아 비에 젖은 호수를 바라보며 휴대폰에 담아온 셀틱 영가를 귀에 흘려보냈다. 구슬프면서 청아한 바이올린과 백파이프의 합주 소리를 듣고 있자니 웬걸 스코티시도 아니면서 가슴이 저릿해왔다. 하찮은 감상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책망하면서도 왠지 이런 아릿한 슬픔이 가슴속에 차오르는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아 내버려두었다.
언제 다시 스코틀랜드를 찾을 수 있을까. 언제 다시 이런 선명한 질투와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영감으로 가득한 땅을 밟을 수 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참으로 기특한 일을 하고 난 뒤 내게 다시 이런 선물을 선사하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