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최다니엘이 소지섭이 됐어.” 뭐, 뭐라고? 또다시 한날한시에 쏟아진 수목드라마 2차전, 몸이 하나인 탓에 모든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미션이었지만, 첫주부터 이렇게 중대한 스포일러를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폭발 사고 현장에서 전신화상을 입은 박기영(최다니엘)이 죽은 김우현(소지섭)의 위조한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던 바람에 성형수술과 성대복원술을 통해 외적으로 거의 완벽한 김우현이 되다니! 이것은 화상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파운데이션을 개발해 자신의 실체를 숨겼던 SBS <아내의 유혹>의 구은재(장서희)도 다다르지 못했던 경지 아닌가. SBS <싸인>을 집필한 김은희 작가의 신작이라는 소식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초장부터 페이스오프라는 과감한 수를 던지다니, 더이상 뒤처질 수는 없었다. 아, SBS <유령> 얘기다.
천재 해커와 강직한 경찰, 사이버 범죄라는 분야로 옮겨졌을 뿐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이는 대결 구도에 지문 인식이나 스테가노그래피(기밀 정보나 메시지를 사진 및 동영상 등 다른 형태의 파일에 암호화해 옮기는 기술) 등 <CSI> 애청자에겐 비교적 친숙한 기술들이 등장하지만 사실 <유령>이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다. 사이버 수사팀의 팀장 김우현이 “현실에서도, 모니터 안의 사이버 세상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원론을 펼치는 것을 넘어 결국 사이버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현실에서도 살고 있는 누군가이며, 이제 우리가 발붙이고 숨쉬며 살아가는 곳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어느 한쪽으로 완벽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접대 루머에 휘말린 뒤 SNS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투신한 여배우 신효정(이솜)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끔찍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동영상 합성 놀이로 만들어 즐기는 사람들, 신진요(신효정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모임)에서 친목을 다지며 “신효정 없었으면 우리 못 만났을 텐데, 다행이다”라고 해맑게 떠드는 인간들이다. 극적 효과를 위한 과장으로 여겨진다면 검색창에 ‘운지’니 ‘홍어’니 하는 단어부터 쳐보길 권한다. ‘타진요’에 관한 기사의 포털 사이트 댓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한 인간의 삶도 죽음도, 역사의 비극도 누군가에게는 ‘합짤’(합성 이미지)이나 악의를 한껏 담은 조롱거리에 불과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미워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밉기 때문에 마음껏 미워할 이유를 찾아내고, 없으면 만들어내려 하며, 자신이 만들어낸 것일수록 굳게 믿는 태도는 어쩌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다만 김우현의 말대로 사람이 ‘척’하지 않고 솔직해지는 유일한 곳이 인터넷이기 때문에 사이버 공간에서의 폭력은 죄의식 없이 확산되고 증폭된다. ‘진실만을 말하는 인터넷 신문사’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트루 스토리>의 최승연(송하윤) 기자가 과거 박기영에게 배운 대로 자극적인 ‘소설’을 쓰고,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는 이유가 목숨을 대신할 만한 죄는 아니”라며 ‘대중’의 기호와 취향 뒤로 슬쩍 숨는 모습에서도 섬뜩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네티즌’ 팔아먹는 기사로 연명하다 바로 그 네티즌으로부터 ‘기레기’(기자 쓰레기의 줄임말)라 불리게 된 직종의 종사자 중 하나인 내게 <유령>이 던지는 돌직구는 가슴을 통과해 날아가버리는 대신 가슴 한켠에 박혀 끊임없이 신경 쓰게 만든다. 그리고 박기영이 김우현과 신효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김우현의 가면을 쓰고 유령으로 사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각자가 지켜야 할 진실의 몫이 있을 것이다. 진실은 자신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거울 앞의 나를, 모니터 앞의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