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죽고 정신을 놓아버린 아내가 평화롭던 일상의 환영 속에서 차려둔 세 사람 몫의 식탁. 아내마저 떠나보낸 빈집에서 백홍석(손현주)은 안쪽에 생활 흠집이 가득한 숟가락 두개를 들고 오열한다. 만약 이 숟가락이 반짝거리는 새 소품이라면, 매일 입속을 들락날락하며 끼니를 함께하고 씻고 닦던 가족의 시간도 증발할 테지. 몹시 꼼꼼한 드라마인 SBS <추적자>는 막후인물인 강동윤(김상중)이 대선 출마 선언 뒤 현충원에 참배를 하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장면의 필체나 카메라의 각도까지 보도화면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디테일에 감탄하다 보니 다시 숟가락의 주인, 홍석의 딸 수정에게 생각이 미친다.
같은 차에 연달아 치이는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의식을 찾는가 싶더니 아버지 친구인 의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수정에게 약물을 주입한다. 죽은 수정은 세상을 떠날 수도 없다. 강력계 형사 홍석이 뺑소니범을 법정에 세웠지만 사고를 인지하지 못한 경우에는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례와 조문도 모자라, 수정의 친구는 함께 성매매를 했다는 거짓증언을 한다. 재판의 흐름은 순식간에 수정이 어떤 아이였는지 여론전으로 뒤바뀌고 그녀의 이름은 청소년 성매매 처벌과 관련한 특별법을 대표할지도 모른다. 너무 지독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추적자>가 놓치지 않으려는 일상생활의 절차와 현실의 파편들은 단지 있음직한 일을 벌여놓고 동시대의 공분을 사려는 전략일까? 참담한 이야기가 생산한 분노의 끝이 그저 ‘인간은 유혹에 약해’, ‘권력은 악하고 서민은 착해’ 정도의 무력한 탄식과 나이브한 개똥철학뿐이라면, 이 드라마, 가루가 되도록 까겠다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수정이는 사고를 당했지만 죽지 않을 수 있었고, 거듭되는 위기에는 늘 모종의 거래와 선택이 작동한다. 강동윤은 “논현동 뒷골목 호빠에서 TC 7만원 받던 놈” PK준(이용우)에게 동승했던 자기 아내 일은 함구할 것을 제안한다. “대치동 학원골목 뒤에 8층짜리 건물이 있어. 그룹 방계회사 소유야. 조용히 지분 넘겨주지. 부족한가? 그럼 안산의 공장부지….” 이렇듯 <추적자> 안 모든 거래의 대가들은 명확하게 밝혀지며, 생명을 위협당하는 협박으로 마지못해 수락하는 거래 따윈 없다. 그 선택을 거절하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던 순간들. 맞물려가는 톱니들은 모두 선명하고 강동윤은 그 움직임으로 위기마다 반전을 만든다. 이 드라마의 강박적인 디테일은 분노를 생산하는 ‘모종의 거래’들의 내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려는 안간힘이다. 강동윤이 임기 말년의 대법관에게 차기정부 총리직을 제안하며 PK준의 변호사 건을 맡기는 상황은 전관예우로 승소를 끌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증거와 판례에 따른, 법적으로 완벽한 무죄를 요구한다.
노숙자 앞에서 그리고 촛불을 든 노동자 앞에서 무료 급식과 촛불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바꿀 권력으로 가는 일직선의 통로가 되어주겠다고 연설하는 강동윤. 그가 제안한 거래들에 의해 법과 절차의 마디마디에서 좌절한 백홍석이 사회안전망 따윈 아랑곳 않는 위험천만한 연설에 매료되고 그를 경호하면서 들었던 촛불을 가장 먼저 불어 꺼뜨리는 장면은 짧지만 소름 끼치게 무섭다. PK준에게 진실을 얻어내려고 법정에 총을 들고 난입했다가 그를 죽이고 만 홍석은 뒤늦게 강동윤의 연루를 알아채고 탈옥한 상황. “내 총이 검사고 내가 판사”라고 절박하게 외치던 홍석이지만 후련한 복수 따위,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해피엔딩은 없다. 그가 톱니 하나하나를 마주보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지. 내 깜냥으론 상상조차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