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한국문화원이 올 한해 내내 주최하는 12인의 감독전에 참석차 런던으로 향했다.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은 현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런던 시내에 자리한 아폴로 극장에서 <러브픽션>을 상영했다. 상영 전 <러브픽션>의 유머를 영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의외로 많이 웃고 진심으로 즐겁게 보는 듯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영 뒤에는 오랫동안 아시아영화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던 토니 레인즈의 사회로 질의 응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영국 관객은 배우 하정우와의 작업이 어땠는지 궁금해했고 영국에서 촬영한다면 어떤 배우를 쓰고 싶은지, 한국에서 영화는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주말에 두번 다시 보기 힘든 행사가 열린다는 말에 런던에 며칠 더 머물기로 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리에는 수십만장의 영국 국기가 내걸리고 상점들은 할인 행사를 하고 크고 작은 이벤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러 행사 중에서도 단연 하이라이트는 일요일에 있었던 여왕의 템스 강 행차였다. 평소에는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템스 강 인근의 공원들이 티켓을 발행하고, 발행된 순간 모든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문화원쪽의 도움으로 나도 티켓을 하나 받아 공원으로 향했다.
지하철은 유모차를 탄 갓난아이부터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까지 영국 국기를 들고 꽂고 얼굴에 그린 영국인들로 만원이었다. 여왕의 얼굴을 직접 본다는 기대가 그들에게 주는 즐거움이 엄청나 보였다. 공원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좋은 자리는 이미 얼리버드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나와 일행은 강가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행사가 생중계되고 있는 대형 스크린 앞으로 갔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여왕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여왕이 검은 리무진에서 내리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자 곳곳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져나왔다. 여왕과 남편 필립 공이 함께 탄 배가 템스 강을 가르고 1천여척의 배가 그 뒤를 따르는 장관이 연출되자 영국인들의 환호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날 행사를 보기 위해 <BBC> 추산 100만명이 템스 강 주변에 모였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이날 행사에 여왕이 입고 올 드레스의 색깔을 맞히는 내기가 전국적으로 벌어졌었다. 왜 영국인들은 여왕과 군주제에 이토록 열광하는가?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한 토니 레인즈는 이 행사를 위해 어마어마한 세금이 낭비되었다고 투덜댔다. 실제로 많은 영국의 지식인들이 군주제에 반대하고 있으며 행사 당일 피켓을 든 반골들도 꽤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국민들 대부분은 자신이 낸 세금이 여왕의 드레스를 맞추는 데 들어가는 데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비도 부슬부슬 오는 데다 앉을자리도 없어 선 채로 식어빠진 샌드위치를 씹으며 겨우 스크린으로 여왕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은 정말 여왕을 통해 영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집에 늘어져 아이들에게 시달리느니 그저 축제를 즐기러 나온 것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