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비평가 주간에서는 ‘프랑스4 비저너리 어워드상’을 신설했다. 이 상은 영화계의 새로운 재능에 대한 젊은 시네필들의 열정적 관심을 반영한 상이다. 파리 3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영화제 시민비평가 출신인 김세희씨는 셀린 시아마 감독을 심사위원장으로 한 네명의 젊은 심사위원단에 선정됐다.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관한 그녀가 그간의 경험을 글로 풀어냈다.
“장 외스타슈와 필립 가렐을 발굴한 비평가 주간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비평가 주간 그랑프리 심사위원장을 맡은 베르트랑 보넬로 감독이 5월25일 수상작 발표를 앞두고 밝힌 소감으로 대신하며 이 참관기를 시작한다. 올해로 51회를 맞은 비평가 주간은 프랑스 비평가조합이 운영하는 칸영화제의 별도 섹션이다. 데뷔작이나 두 번째 영화를 대상으로 참신한 감독을 발굴하는 작업을 해온 비평가 주간을 거쳐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으로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장 마리 스트라우브, 켄 로치, 레오스 카락스, 왕가위 등이 있다.
<아퀴 이 알라> 팀, 왼쪽에서 네 번째가 안토니오 멘데스 에스파르자 감독이다.
에스파르자 감독의 <아퀴 이 알라>에 만장일치
프랑스 감독 셀린 시아마를 심사위원장으로 각각 미국, 벨기에, 인도 출신의 젊은 평론가로 구성된 5명의 비전 심사단의 활동은 7편의 장편 경쟁작 중 한 작품에 상을 수여하는 것. 매일 오전 11시30분 하루에 한편씩 크루아제트 해변에 자리한 미라마 극장에서 공식 상영을 가지고, 영화가 끝나면 영화관 무대 뒤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최종 심사는 칸 해변에서 프랑스식 저녁 식사와 함께 진행되었다. 각자 베스트 3편을 뽑아 다수의 표를 얻은 영화를 골라낸 다음 한편을 정하는 방식. 베스트영화는 <아퀴 이 알라>(Aqui´ y Alla´)로 심사단 만장일치였다. 고다르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여기 그리고 저기”라는 뜻의 <아퀴 이 알라>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다. 스페인 출신 안토니오 멘데스 에스파르자 감독은 뉴욕에서 영화 공부를 할 때 만난 이민자 페드로가 멕시코 고향으로 돌아간 소식을 전해 듣고 멕시코로 가서 그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족 곁으로 돌아왔지만 성장한 딸들에게서 느끼는 거리감, 악기 연주자로서의 꿈, 의료 시스템의 벽은 영화에서 결코 보여지지 않고, ‘저기’로 암시된 미국이라는 상징적 대타자를 드러낸다. 롱테이크와 황량한 풍경, 현실과 픽션의 중간에서 “아름다운 순간들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촬영 중 일어났다”라는 감독의 인터뷰는 페드로 코스타의 작업 방식과도 닮았다.
두 번째 베스트 명단 역시 모든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소피아의 마지막 앰뷸런스>는 슈퍼히어로 영화다. 단 13대의 앰뷸런스가 200만명을 책임지고 있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내가 한 것은 카메라의 위치를 정하는 것뿐이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텐>에서 극단적으로 사용한 형식처럼 자동차 앞에 고정된 카메라는 위급한 상황과 다투는 3명의 앰뷸런스 구조원들의 얼굴을 포착한다. <소피아의 마지막 앰뷸런스>는 현장에 출동해서도 의도적으로 환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구조원들의 얼굴과 노동에만 집중하면서 도시를 지키는 슈퍼히어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낸다.
너무 쉬운 시험지를 받은 탓일까. 저녁 코스의 메인 요리가 채 나오기도 전에 심사는 끝났다. 한 가지 남은 논의가 있다면 옆 테이블에서 심사 중인 그랑프리 심사단이 <아퀴 이 알라>를 뽑을 경우. 비평가 주간에서는 같은 영화에 상을 주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랑프리 심사단이 <아퀴 이 알라>를 뽑으면 <소피아의 마지막 앰뷸런스>에 상을 주기로 결정했다. 나눠 먹기식 수상이라기보다는 후자도 충분히 좋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5편의 영화들도 데뷔작임을 감안하면 준수했지만 ‘발견’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심사 결과는 <아퀴 이 알라>가 그랑프리를, <소피아의 마지막 앰뷸런스>가 비전상을 수상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감독은 누구입니까?” 어느 시점부터 취향으로 상대를 알아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집에는 파리 3대학 영화과에 다니는 학생이 살고 있다. 방음이 안되는 얇은 벽 하나 사이라고 생각한 우리의 거리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팀 버튼을 꼽은 순간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혔다. 물론 그녀는 상냥하고 순수하다. 나는 홍상수 영화의 미학적, 윤리적 태도에 관해 유려하게 풀어내는 사람이 실제로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칸에서는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 것이 외우기 쉽지 않은 외국인의 이름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친근한 인사법이 되며,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허물기도 한다.
비평가 주간 선정위원이자 파리 3대학 교수인 샤를 테송은 알려진 대로 한국영화에 관심이 높고, 좋아하는 감독과 싫어하는 감독이 분명했다. 칸영화제를 앞두고 파리에서 열린 파티에서 처음 만난 샤를 테송은 내가 필립 가렐의 영화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가렐의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고, 25일 칸에서 정말로 그녀를 데려와 소개시켜주었다. 가렐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고, 그녀는 필립 가렐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현재 필립 가렐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모리스 가렐에 관한 영화를 작업 중이며, 이번에는 루이 가렐이 모리스 가렐을 연기한다고 한다. 기억의 궤적을 더듬어가는 그의 영화적 시간이 어떻게 아버지를 회상할지 궁금하다.
칸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홍상수의 팬이라니!
12일 동안 머문 숙소는 크루아제트 해변 뒤편의 한적한 주택가. 나는 셀린 시아마 감독과 함께 방이 분리된 아파트를 썼다. 떠나오기 며칠 전에 알게 된 사실. 바로 아래층엔 홍상수 감독도 머물고 있었다. 첫날 내게 경쟁작 중 몇몇 영화를 추천해준 시아마 감독은 정작 자신이 흠모하는 홍상수와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 단 두편만을 보고 떠났다.
샤를 테송은 비평가부문 단편에서 카날플러스상을 수상한 <순환선>의 신수원 감독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제 기간 내내 칸의 날씨만큼 지독했던 신수원 감독의 감기는 안타깝게도 그녀의 목소리를 앗아갔다.
레스토랑과 호텔들이 해변을 사유화하고 있는 칸의 풍경은 넓게 트인 해운대의 모래사장과는 사뭇 다르다. 칼튼호텔 앞 네스프레소 해변은 비평가 주간만의 공간으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 뉴욕에서 온 <아퀴 이 알라> 제작자 팀도 이곳에서 만난 친구다. 영화 현장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제작자에 대해 약간의 편견이 있다. 얼마 전 이명세 감독이 제작자와의 불화로 중도하차하게 된 것을 비롯해 오래전부터 할리우드에서 제작자는 작품을 검열하던 이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아퀴 이 알라>는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고, 감독뿐 아니라 영화를 제작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팀은 철학을 공부하고 장 르누아르와 오즈 야스지로를 존경하는 열렬한 시네필이었다. 그리고 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홍상수 감독의 팬이라는 사실은 놀라웠다.
클로징 파티에서 <아퀴 이 알라>의 에스파르자 감독은 느닷없이 내게 칸영화제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너무 과한 것 같다는 나의 의견에 그는 수상의 기쁨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극 공감했다. 유운성 프로그래머가 전주국제영화제를 맛있는 떡볶이 집에 비유했다면 칸영화제는 뷔페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부터 차이밍량의 비디오 아트 작업 <Walker>까지 지나치게 폭넓은 영화의 스펙트럼과 거대 광고주들이 매일 밤 여는 파티, 스타덤, 대형 영화 마켓, 음식, 심지어 커피 스폰서 네스프레소사의 15종류의 커피까지. 다행히 비평가 주간은 칸영화제에서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하나의 가이드가 되어주어 뷔페에서 김밥만 먹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의 영화를 보고 비평을 하고 발굴해내는 작업은 여전히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다. 영화가 무엇을 어떻게 담는가는 곧 세계가 어떻게 의미화되는가를 묻는 일이다. 영화- 세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자신만의 기준을 고민해보는 긴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