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에게 ‘경인운하’의 유람선 얘기를 들었다. 유람선을 타고 아무리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도 보이는 건 양옆의 콘크리트 둑. 얼마나 볼 게 없던지 유람선에서 고작 둑 위를 달리는 자전거만 구경하다 돌아왔단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 대목이다. 볼 게 없기는 자전거 탄 이들도 매한가지. 그들은 유람선을 구경하더란다. 구경을 하면서 구경을 당하는, ‘상보적’ 유람, ‘재귀적’ 관광. 두개의 손이 서로 상대를 그리는 에셔의 작품을 닮았다.
자연을 수정하는 고전주의
영주 내려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며 내려다본 남한강 자락. 시멘트로 덮은 강변에 자전거 길이 나 있다. 물론 그 위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강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하는 걸까? 누구나 다 알다시피 이른바 ‘4대강 사업’은 삽질을 통해 경기를 부양해 고도성장을 하겠다는 각하의 미련한 집념의 결정체다. 하지만 거기에는- 비록 결정적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각하 특유의 ‘삽질 미학’도 한몫했을 것이다.
미학사에서 각하의 ‘삽질 미학’의 이론적 원형을 찾자면, 저 멀리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헤겔은 자연미에는 결함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미는 늘 예술미로 보완되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고대의 조각가 페이디아스는 헬레나 상을 만드는 데에 다섯명의 모델을 사용했다고 한다. 현실의 여인들은 저마다 결함을 갖고 있기에, 한 여인의 신체를 자연 그대로 묘사했다가는 이상미, 즉 미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가령 화가가 풍경을 그린다 하자. 아무리 좋은 풍경이라도, 그 안의 대상이 늘 이상적 질서로 배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화가는 너무 빽빽해 보이는 곳에는 있는 나무를 지워버리기도 하고, 너무 허해 보이는 곳에는 없는 바위를 그려넣기도 할 것이다. 한마디로 화폭 위에서 ‘자연을 수정’하는 셈이다. 고전주의 화가들이 화폭 위에서 브러시를 들고 하던 그 작업을, 각하는 목하 현실에서 삽을 들고 실물로 하시는 중이다.
삽 들고 자연을 수정하려 든 것은 각하가 처음이 아니다. 가령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생각해보라. 그곳의 정원은 기하학적 형태로 만들어져, 그 안의 모든 나무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자로 배열되어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자연을 완전히 뜯어고친 셈이다. 이것이 자연을 대하는 고전주의자들의 태도다. 각하의 삽질 미학은 이 악명 높은 고전주의의 취향을 시대에 맞게 산업적 규모로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조경에서는 흔히 이 프랑스식 정원의 안티테제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영국식 정원이다. 영국의 정원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재현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도심을 벗어나면 언제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처럼 느껴진다. 이 두 조경술의 차이는 두 민족 사이의 기질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두 시대 사이의 취향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프랑스식 정원이 고전주의적이라면, 영국식 정원은 낭만주의적이다.
이 낭만적 관념의 이론적 표현을 아마도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예술은 자연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자연미는 예술미의 전범이 된다. 한마디로 헤겔이 인공미를 자연미의 위에 올려놓았다면, 칸트는 거꾸로 예술미를 인공미의 위에 올려놓은 셈이다. 아무튼 이 관념에 따르면, 훌륭한 예술작품이라면 그 안에서 인공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영국식 정원이 바로 그런 예술이 아니던가.
인공미와 자연미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에 해당하는 게 한국과 일본의 정원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 같다. 일본의 정원은 완벽한 인공미를 자랑한다. 나무에는 가위가 닿지 않은 부분이 없고, 구석의 세밀한 부분까지 섬세한 손길을 거친 자취가 느껴진다. 반면 한국의 정원은 어떤가? 마치 자연 속에 그냥 방치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잡풀이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여기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과 일본의 ‘예술의지’가 얼마나 다른지 볼 수 있다.
한국의 예술의지를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자. 언젠가 낙산사에 갔을 때 그곳의 담장을 보고 매우 강한 인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흙을 쌓아올려 하단을 만들고, 중단에는 듬성듬성 기와를 박아넣다가, 상단에 완전한 인공의 지붕을 얹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담장은, 마치 땅에서 버섯이 자라나듯이, 대지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한국의 예술의지는 인공의 구조물마저도 마치 자연의 산물로 보이게 하는 데에 그 요체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건축은 대개 자연석 위에 구조물을 세운다. 문제는 이 자연석의 울퉁불퉁한 표면과 인공적 구조물의 매끈한 표면을 어떻게 매치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연석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매끈하게 밀어버리고 그 위에 인공석을 올려놓는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의 조상은 이 간편함을 버리고, 외려 인공석의 아랫부분을 자연석의 울퉁불퉁한 모습을 따라 파나갔다. 이를 ‘그랭이법’이라 부른다.
탈근대의 예술의지
‘그랭이법’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조상은 인공과 자연이 부딪히는 곳에선 자연에 우선권을 주었다. 물론 이런 미감이 ‘근대화’에는 불리했을 거다. 1970년대 교과서에는 지게와 구불구불한 길을 선호한 게 한국의 후진성을 낳았다는 내용의 에세이가 실리기도 했다. 일본이 우리보다 근대화에 앞섰던 데에는 이 취향과 기술의 차이도 적잖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일제시대’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풍경 중 하나가 사실 자동차와 신작로가 아니던가.
하지만 사회가 근대의 ‘개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생태주의로 이행함에 따라, 한때 ‘후진적’이라 여겨졌던 한국의 미감이 외려 시대를 앞서가는 패러다임이 되었다. 하지만 광기에 가까운 근대화를 거치면서 우리는 어느덧 일본인들보다 더 인공을 좋아하게 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인공미에 대한 일본인들의 섬세한 미감을 갖출 시간이나 여유는 없었다. 그 결과 갖게 된 기형적 취향이 바로 각하의 무지막지한 ‘삽질 미학’이다.
청계천을 생각해보라. 사실 청계천은 조선시대에도 인공하천이었다. 하지만 조상들의 미감은 그 인공마저도 마치 자연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청계천은 제2의 자연이었다. 하지만 각하의 청계천은 어떤가? 자연이자 역사인 그 문화재에 통째로 공구리를 친 뒤 한강에서 끌어온 물을 거꾸로 흘리지 않았는가. 현재의 청계천은 ‘하천’보다는 차라리 ‘분수’에 가깝다. 분수가 물길을 늘 수직만 뿜는 것은 아니다. 수평으로 흐르는 분수도 있다.
각하의 미감은 청계‘천’을 이렇게 두터운 공구리 아래 묻어버렸다. 듣자 하니 박원순 시장이 다시 청계천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생태와 역사의 복원이 되게 하려고 꽤 오랜 시간에 걸쳐 토의하고 실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임기’ 안에 자연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복원할 수는 없는 일. 우리 조상이 인공석의 하단을 자연석에 모양에 맞게 정성스레 나아갔듯이, 그렇게 섬세하고 정교하게 자연을 회복시켜야 한다.
기계와 달리 자연은 느리다. 자연을 복원하려 한다면 일단 그 속도부터 닮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