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서른이 넘으면 멋진 남자를 만날 가능성보다는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20대 중반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희극처럼 보이는 남의 비극인 양 박장대소했지만 30대를 지나며 가끔 그 희비극의 주인공이 결국 나였다는 사실, 그래도 나니까 하는 존심,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알이 박혀드는 어떤 예감들, 가끔 터뜨리고야 마는 분통에 지쳐갈 때쯤. 그러다 ‘이놈 저놈’ 간 보는 그 지겨운 시간들이 다 지나고 비로소 마흔 즈음이 돼서야 확신하게 됐다. 자신에게 정말로 꼭 맞는 상대를 만나려면 적어도 서른다섯은 넘어야 하고 40, 50살쯤 돼야 안목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돋아난다는 사실.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내 오랜 염원을 아는 언니가 어느 날 나에게 딱 맞는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주겠다 한다. “사람 순수하고 음악 좋아하고 책 좋아하고 네가 딱 좋아할 타입이라니까.” 근데 아내도, 여자친구도, 딸린 자식도 없는 솔로라고? 돌싱도 아니고? 아니 왜? 그렇게 괜찮은 남자가 왜? 이상한데 하자 “행색이 좀 그래. 노숙자 수준이랄까? 실제로도 거의 거지 수준!” 음 그렇구나…, 땅거지.
예전 같으면, 그러니까 내가 40대가 아니라 30대의 미스로서 제법 자본주의적 시장 가치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땐 다음과 같은 영악한 이유를 둘러대며 사양했을지도 모른다. “언니, 내가 많이 만나봐서 알거든. 경제적 결핍감이 있는 남자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상한 콤플렉스가 있더라고.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즐길 줄 몰라” 하면서. 그런데 난 닳고 닳은 마흔, 다행인 거다. ‘서른이 넘은 여자에게 남자는 주차장으로 치면 장애인석, 지하철로 치면 노약자석만 남은 꼴’이라는데, 난 딱 마흔이었다. 그러니까 가난뱅이라도 좋으니, 영혼이 부자인 남자였음 좋겠다고(만약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 소망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거다.
실제로 만나보니 홈리스까지는 아니었다. 1천만원짜리 전세(전세라니, 헐)이긴 하나 나름 운치있는 농가주택에서 살고 있었고 행색이 좀 ‘꼬름’하긴 해도 천상병 시인처럼 늙은 소년 같은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게다가 자기의 가난에 대해 콤플렉스가 별로 없어 보였다. 무슨 무용담처럼 이런 얘기를 할 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일주일이나 열흘쯤 살 때였는데 무단횡단하다가 경찰한테 딱 걸린 거예요. 그게 보통 3만원짜리잖아요. 어쩌면 5만원? 그래서 죽어라 도망쳤죠. 그런데 썅! 이 아저씨 끝까지 따라오네. 50살 먹은 아저씨가, 체! 완전 지쳐서, 너무하지 않냐고, 못 받은 일당이 있어서 그거 받아 오는 길인데, 지금 그 돈을 뺏겠다고 악착같이 따라오냐 했더니, 자기는 내가 무슨 지명수배자라도 되나 싶어서, 어쩌면 오늘 한건 하나보다 하는 마음으로 죽어라 쫓아왔대. 근데 자기도 완전 실망했다며 1만원짜리로 뭔 인심 쓰듯 척 하니 끊어주더라고요.” 그런데 그 남자가 난 너무 좋았다. 새우깡 하나를 사더라도 살까 말까, 들었다 놨다 하며 고뇌하는 남자, 너무 예뻤다. 저런 모질이. 너무 좋아서 자주 춤을 췄다. 춤을 추다가 그 남자를 만나게 해준 온 우주의 파동에 감사했다. 예전에 더럽게 느끼하다 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이런 확신은 인생에 단 한번뿐이라오” 하던 늙은 카우보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 으, 역시 느끼. 체, 내가 하고 만다. 각자의 무덤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