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매니아>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어쩌면 올해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 예정작일지도). 제목이 말하듯 레코드 애호가가 세계를 돌며 동지들을 찍은 작품이다. 레코드가 주변에서 거의 사라진 지금, 그들은 안타깝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 레코드야말로 가장 훌륭한 재생 매체이며 CD나 MP3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음을 전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들 가운데 레코드와 CD로 듣는 음악이 딱히 어떻게 다르다, 라고 밝혀주는 사람은 없다. 차이는 개인의 느낌에서 발생한다. 바늘이 미세한 홈을 타고 지나갈 때의 느낌, 뱅뱅 도는 음반의 라벨 부분이 불러일으키는 현기증 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일례로 일본에서 개발된 ‘바늘 없이 재생하는 레코드플레이어’를 틀어본 감독은 소리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속을 들여다볼 수 없게 설계된 탓에 “레코드가 안 보인다면 CD플레이어와 다를 게 무어냐”라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올 따름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회고전을 맞아 ‘앙투안 두아넬 시리즈’의 원고를 준비 중이다. 연작 중 <앙투안과 콜레트>는 덜 알려진 편이다. 애당초 <400번의 구타>의 속편은 예정에 없는 것이었고(두아넬이란 성도 나중에 주어졌다), 옴니버스영화 <스무살의 사랑> 중 프랑스편을 제안받기 전까지 트뤼포는 속편 연출을 갈등하던 터였다. 트뤼포는 자기 이야기를 다시 영화에 투영하기로 했다. 영화에 빠진 17살의 트뤼포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오가다 운명의 소녀 릴리안 리트뱅을 만나 사랑하게 된 것을 바꾸어, 음악을 사랑하는 17살 앙투안이 음악회에서 첫사랑 콜레트를 만나는 것으로 설정했다. 내가 <앙투안과 콜레트>를 유달리 좋아하는 이유는 레코드가 중요한 소재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독립생활을 꿈꾼 앙투안은 레코드 제작회사인 ‘필립스’에서 일한다(녹음은 물론 레코드 생산도 겸하는 회사다). 단편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한 장면은 플라스틱 덩이가 한장의 레코드로 변화되는 공정을 제법 길게 보여준다. 내게 이 장면은, 알랭 레네가 1957년에 연출한 단편영화 <스티렌의 노래>의 대구로 보인다. 레네가 현대사회의 한 토대를 차지하는 플라스틱 제품의 근원을 영상시로 읊었다면, 트뤼포는 플라스틱이 훈훈한 검은빛 레코드로 체화되는 과정을 그렸다. 아침에 일어난 앙투안은 레코드 위에 바늘을 얹어 음악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의 방에 걸린 몇장의 레코드 중에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브루노 발터 지휘의 말러 교향곡도 있다. <앙투안과 콜레트>를 보면 손때 묻은 재킷에서 레코드를 꺼내 턴테이블에 걸고 싶어진다.
트뤼포는 영화의 친구들을 얻었으나 리트뱅과의 사랑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트뤼포와 고다르가 경쟁하듯 사랑했던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끌리고 만다. 앙투안도 콜레트의 가족과 친밀해지면서 정작 그녀와의 사랑엔 실패한다. 삶에서 무언가를 구하면 소중한 다른 하나를 잃게 마련이다. 같은 이치로, 수많은 MP3 파일을 컴퓨터에 쌓아둘수록 진짜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단 몇장의 레코드를 정성스레 닦아가며 감상하던 순간들이 그립다. 음악이 고독한 내 곁에서 위안으로 머물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