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taste)에 관한 한 논쟁할 수 없다’는 격언은 고대 로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로마시대 이후 우리는 커피나 와인에 대한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며, 그 상이한 취향들 사이에 우열이란 있을 수 없음을 안다. 우리가 커피나 와인의 취향을 놓고 굳이 논쟁하려 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늘날 ‘어느 것이 좋은 커피인가’ 혹은 ‘어느 것이 좋은 와인인가’와 같은 물음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주관적 기호의 문제로 치부된다.
취미는 논쟁할 수 없다
그러면 ‘미’(美)는 어떨까? 오늘날 ‘미’에 대한 취향도 다양해져 거의 기호의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17세기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미에는 객관적 기준이 있다고 믿었다. 아직도 우리는 ‘이 꽃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이 꽃은 내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미적 판단에는 뭔가 보편성에 대한 요구가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하긴 커피나 와인에도 맛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고, 그 맛을 감정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이들이 있지 않던가.
실제로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자들은 무엇이 아름다운 예술인지 판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을 자기들이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 기준 중 하나가 회화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형태’(드로잉)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이외의 지역은 회화에서 형태보다 색채를 중시하는 바로크 취향, 가령 루벤스의 화풍이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위배되는 이 흐름을 ‘몰취향’으로 간주했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와 달리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이었던 영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영국인들은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가 동의할 만한 미의 객관적 기준이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 한마디로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이 미에 연역적으로 접근했다면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거기에 귀납적으로 접근한 셈이다. 물론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취미의 객관적 기준을 발견하는 데에 실패했다.
주관적 보편타당성
프랑스 합리론을 취하면 미적 독단론에 빠지고, 영국 경험론을 취하면 미적 회의론에 빠진다. 칸트는 이 두 입장을 적절히 종합함으로써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취향이 주관적이라는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나, 동시에 ‘미적 판단은 보편타당하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미적 판단은 ‘주관적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관적인 판단이 동시에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 형용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칸트는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하나는 ‘미적 무관심성’이라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사람마다 미적 판단이 달라지는 것은 거기에 불순한 요인들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가령 미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작품은 그저 재료가 금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정치적, 종교적 관심 역시 작품의 공정한 판정을 방해하는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런 예술 외적인 ‘관심’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판단을 내린다면 모든 이의 미적 판단이 일치하리라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공통감’,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의 인식기관이 선험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인식기관은 동일하기에, 비록 개인의 쾌/불쾌의 감정에 따른 주관적 판단이라 할지라도 그 판단이 공통감에 근거한 거라면 동시에 객관적 필연성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미적 판단을 내릴 때에 온갖 사적 이해와 관심에 얽매인 ‘경험적’ 자아에서 벗어나, 공통감에 따라 판단하는 ‘이상적’ 자아의 위치로 올라서야 한다는 얘기다.
정의는 논쟁할 수 없다
이게 어디 미적 판단만의 문제겠는가? 저마다 나라를 위한다고 하나 특정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은 종종, 아니 거의 언제나, 서로 갈린다. 왜 그럴까? 그것은 경험적 자아들은 사적으로는 금전과 권력과 같은 물질적 이해, 공적으로는 다양한 가치관과 같은 이념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명백한 사안에 대해서도 정치적 해결이 안되고 사회적 합의가 안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은 여기서 비롯된다.
이 사회에 팽배한 진영논리도 마찬가지. 동일한 사안이라도 네 편이냐, 내 편이냐에 따라 판단이 180도로 달라진다. 그 결과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로마인들은 ‘취미에 대해 논쟁할 수 없다’고 했지만 논쟁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취미겠는가? 오늘날 이미 많은 이들이 ‘정의에 대해서는 논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에 팽배한 정치적 환멸은 바로 이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물론 사적 이해를 배제한 무관심성의 상태에서, 칸트가 말하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의 위치로 올라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사회는 이른바 ‘상식’(common sense)을 갖게 된다. 사실 우리 사회에 결여된 게 바로 그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의 문제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이냐 몰상식이냐의 문제”라는 안철수씨의 얘기도 결국 이를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 담화상황?
철학자 하버마스가 이상적 담화상황을 위한 조건들을 제시한 것도 이와 비슷한 답답함에서였을 것이다. 모든 이가 사적 이해에서 벗어나 오로지 공공의 이익의 관점에 판단을 내린다면, 당파들 사이에 무난히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적 판단에서도 도달하기 어려운 무관심성과 공통감의 상태를, 정치의 영역에서 기대할 수 있을까? 정치적 담론이 여러 계층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적 문제가 그렇듯이, 이 문제 역시 높은 철학적 추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어느 정도 ‘상식’을 가진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사이의 소통문화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가령 선거에 심각한 부정이 있었다면 그 선거의 결과는 무효로 돌리는 것이 ‘상식’이다. 여기에 여야의 차이, 진보/보수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상식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이조차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소통에는 공통의 전제가 필요하다. 가령 서로 전제가 다른 두 입장, 유클리드 기하학과 리만 기하학이 삼각형의 내각의 합에 관해 유의미한 논쟁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적 소통에 능한 성숙한 사회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의 전제를 갖고 있다. 그것을 흔히 ‘상식’이라 부른다. 사회에서 상식이 자리잡으려면, 기꺼이 사적 이해와 당파의 소속을 떠나 사안을 ‘공통감’의 관점에서 판단할 준비가 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야 한다.
칸트가 말한 ‘공통감’은 현실적 상태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이상적 조건의 ‘요청’에 가깝다. 현실에 사는 누구도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와 관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단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잠시나마 이상적 자아로 끌어올리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왜? 성숙한 사회의 에토스는 바로 그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통감’은 형이상학적 허구에 불과하나 ‘취미’와 ‘정의’의 영역에서 소통을 위해 가정해야 하는 불가피한 허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