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화제 끝나면, 저 나뭇잎부터 치워야겠다.” 서울인권영화제 사무국 앞마당에는 지난해 가을 떨어진 낙엽이 아직도 수북이 쌓여 있다. 그건 인권영화제가 보듬어야 할 일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난 1년 동안 인권영화제의 두 상임활동가, 김일숙과 은진은 ‘등급을 받지 않을 권리’인 영화및비디오물의진흥에관한법률(이하 영비법) 개정을 위해 투쟁하고 거리상영의 장소 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5월25일부터 28일까지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17회 영화제가 끝나면, 내년 1월로 예정된 인권운동사랑방에서의 독립 준비도 해야 한다.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온 인권영화제의 김일숙 상임활동가를 만나 자세한 사정을 들어봤다.
-영화제 개막이 3일 남았다. =이쯤 되면 마음을 비운다. (웃음) 그래도 상영작이 30여편이니 규모 큰 영화제들보다는 사정이 낫지 않나 싶다.
-올해 출품작들의 경향이 있다면. =청소년 폭력이 사회적인 이슈라서 학생 폭력을 다룬 극영화가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소재가 인권문제와 관련있다고 해서 무조건 인권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같은 학생 폭력을 다루고 있다 하더라도 다루는 방식이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라면, 인권을 얘기하는 과정 자체가 반인권적이기 때문에 선정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심사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지의 여부다.
-‘기억으로 묶다’라는 섹션이 신설됐다. =우린 매년 섹션을 만들고 없애는 과정이 좀 자유로운 편이다. (웃음)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다룬 영화들을 모은 섹션이다. <촛불다큐 우리 집회할까요?>는 2008년 촛불문화제를 조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촛불집회를 했음에도 달라진 건 별로 없다는 패배의식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에겐 이런 힘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는 장애인들이 온몸을 던진 저상버스 도입 투쟁을 다룬 영화다. 사람들은 세월이 좋아져서 저상버스가 생긴 줄 알겠지만, 장애인들에겐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전국 100% 저상버스 도입’을 위해 다시 한번 장애인들이 투쟁에 나설 예정이다. 관객이 그 역사를 알지 못하고서는 장애인들이 왜 거리에 나와 싸우고, 왜 우리는 그 버스를 타고 있는지 모를 거다. 그 역사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인권영화제 거리상영이 5년을 맞았다. 잃은 것과 얻은 건 무엇일까. =잃은 건 하나밖에 없다. 상영관. 얻은 건 많다. 더 많은 관객을 얻었고, 그중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후원인도 생겨나고, 광장에서 영화제를 여니 인권단체도 관객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고 하더라. 극장은 좀 답답한 면이 있었는데. 위기가 기회라고, 얻은 점이 훨씬 많다.
-거리상영은 영비법에 대한 인권영화제의 투쟁과도 관련있다. 극장에서 영화제를 열 수 없는 이유는, 인권영화제가 등급을 분류받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영진위의 등급분류면제추천을 없앴으면 하고, 더 큰 목표는 등급분류 자체를 없애는 거다. 사람들이 등급분류의 필요성을 거론하며 청소년 보호를 얘기하는데, 마당놀이를 예로 들어보자. 마당극을 보면 남성의 성기를 그대로 노출하고 여성의 몸에 대해 풍자하고, 권력을 비꼰다. 우리 고유의 문화가 그렇게 남녀노소가 마당에 모여 풍자와 해학을 즐기는 거였는데 그 장소를 극장으로 이동했다고 해서 나이가 몇살이면 못 보고, 부모 동반하지 않으면 못 보는 게 더 웃긴 일 같다.
-등급 심의를 거부한다는 건 영화계 내부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인 의견이다. 이 싸움을 길게 보고 있나. =그렇다. 법 개정 때문에 국회의원들을 몇번 만나기도 했는데, 주거문제, 노동권 문제가 워낙 심각한 데다 영화 관련 문제들도 산재해 있기 때문에 영비법 얘기는 손톱만큼도 논의가 안되는 상황이다. (웃음) 여전히 영비법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영상물 등급이 있으나, 인권영화의 경우 등급 없이 자유롭게 상영하자는 의견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 이런 저변을 확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내년 1월 소속되어 있던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독립한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나.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정기후원을 모집해 단체를 꾸려나가보려 한다. 독립하면 감독들이나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인권영화가 무엇인지 함께 기획하고 토론해보는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할 계획이다. 인간에 대한 존엄과 배려를 꼭 영화에서 다루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속엔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