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매치’한 세상과의 불화를 기꺼이 즐기는 임상수 감독이 <돈의 맛>을 들고 찾아왔다. 금기의 성역을 호기심의 무대로 전환하는 데 능한 임상수 감독은 어떤 거대 담론에도 기대지 않는 자신만의 전투적 화법으로 아이러니의 연속인 삶의 폐부를 찌른다. 다만 제도를 꼬집고, 역사를 할퀴고, 무용담을 일축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한 변화다. <하녀>(2010)와 달리 <돈의 맛>에는 자본의 위계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을 보듬고, 어루만지려는 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깃들여 있다.
-아무래도 <하녀>와 비교할 수밖에 없다. =안 좋은 접근이다. (웃음)
-기자간담회 때 “<하녀>가 미진하다고 느껴 <돈의 맛>을 시작했다”고 했다. =<하녀>는 리메이크 제안을 받은 것이라 미진할 수밖에 없다. <돈의 맛>까지 오게 된 데 있어 김수현 작가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그분이 쓴 <하녀> 시나리오 초고는 원작의 중산층이 아닌 진짜 부자들 이야기였다. 그걸 내가 바꿔서 문제가 됐지만. 어쨌거나 <하녀>를 찍으면서 잊고 있었던 본능이 깨어났다. 오래전에 조감독들하고 우리가 반지하방에서 깡소주에 새우깡 먹으면서, 데뷔하면 강남의 잘나가는 언니들이 와서 보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게 좀 그렇지 않냐는 말을 나눈 적이 있다. 존재를 배반하는 영화를 찍어야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거냐 그러면서.
-<돈의 맛>의 나미를 보고 누구나 <하녀>의 나미를 떠올릴 것이다. <하녀>의 “나미가 크면 괴물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막상 <돈의 맛>의 나미는 그나마 세상을 긍정하는 인물이다. =그나마? 냉소적이고 이죽거리고, 보는 사람 뒤통수나 치고. 임상수에게 달린 레이블 같은 건데. 가끔은 나보고 그렇게 말하는 젊은 평자들이나 기자들이 더 냉소적이 아닌 싶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감상적인 환상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내가 만든 영화들을 정확히 보면 그 안에는 순진한 희망이 담겨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그런 영화들을 만들 수는 없다.
-<하녀>를 들고 칸에 갔을 때 김홍집 음악감독이 인터뷰 발언(“나미가 크면 괴물이 될 것”)에 대한 항의 메일을 보냈다고 들었다. “그날 나미가 본 건 아버지의 돈에 굴복하지 않는 은이라는 여자다. 나미는 그 순간 은이의 유산한 아이를 대신하게 된다. 난 나미에게 어떤 희망을 봤다”는 내용이 담긴. =요번에도 긴 이메일을 보내왔다. 나미가 백금옥과 걸어나오며 어릴 적 기억을 말하면서, 우리가 이 사람들한테 이러면 안된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했다고. ‘그 나미가 이렇게 자라다니!’ 자기가 그렇게 키운 거지. (웃음)
-<돈의 맛>에서 <하녀>의 인물들은 세포분열을 통해 진화한다. <돈의 맛>을 <하녀>의 리메이크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이름없이 흘러다니는 하녀들의 얼굴을 한번식 보여주는 장면을 찍으면서 저들이 다 은이의 분신이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다. 따지고 보면, <돈의맛>은 그전에 김기영의 <하녀>(1960)와 이를 리메이크한 <하녀>가 있었기 때문에 완성할 수 있었다. 두 영화의 장면들을 집어넣은 이유다. 저작권을 풀기도 쉬웠고. (웃음)
-윤여정, 백윤식 등은 전작에서 함께했지만 김강우, 김효진과는 처음 작업했다. 출연을 결정할 때 상반된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백윤식 선생은 절대로 놓치면 안되겠다 싶어 1년 전부터 스케줄을 협의했다. 윤여정 선생님은 섹스 신이 있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못하겠다고 할 분은 아니고. (김)강우씨는 걱정을 되게 많이 했다. 매 장면 다 나오지만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으니까. 대사가 너무 없는 것 아니냐고 해서 카메라는 다 네 위주로 찍을 거다, 라고 꼬였다. 나미는 정말 캐스팅이 안되는 역할이었다. 비중으로 치면 ‘넘버4’니까. 나야 ‘넘버2’라고 했는데, 매니저들이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웃음) 그런데 효진씨가 결혼식을 앞두고도 하겠다고 하더라. 뜨고 싶다, 예쁘게 보이고 싶다, 뭐 그런 생각 안 하는 배우다. 감독 입장에서야 너무 사랑스럽지.
-그 밖에도 인물들이 많다. 동시상영 영화를 본 것 같다. (웃음) =<그때 그사람들>을 찍으면서 방에 6∼7명의 배우들을 몰아넣고 찍는데 진짜 재밌었다. <오래된 정원> 때는 두 사람만 데리고 찍으려니까 너무 지루하더라. 에너지도 잘 안 나오고. 이번엔 등장인물이 정말 많다. 누가 주인공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떤 캐릭터도 도구로 쓰지 않고, 자기 신에서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그런 앙상블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실수도 좀 했지만 그런 도전을 해야 힘이 나는 것 같다.
-실수라면 현장에서의 돌발상황인가 아니면 찍고 나서의 아쉬움인가. =아쉬움이지. 뭔지는 내 입으로는 절대 말 못하지만. (웃음)
-두개의 삼각관계가 존재한다. 백금옥을 중심으로 한편에는 에바와 윤 회장이 있고, 또 한쪽에는 영작과 나미가 있다. 에바와 영작은 같은 계급이며, 윤 회장과 나미는 한가족이다. =처음 캐릭터를 만들 땐 백금옥과 윤 회장으로부터 시작했다. 수십년에 걸친 두 남녀의 관계, 애증의 아이러니를 들여다보는 것이 재밌었다. 한때는 둘이 진짜 사랑했을 것이다. 아마도 백금옥이 더. 윤 회장이 훨씬 더 똑똑하고, 미남이고, 게다가 예술가 기질도 있고. 심지어 장인도 윤 회장을 되게 예뻐했을 것 같지 않나. 그런데 결혼이라는 것이 남녀가 서로 겨루는 관계이기도 하다. 결국 윤 회장이 백금옥한테 진 건 돈 때문이지. 그런 윤 회장이 갑자기 에바랑 떠난다고 선언해서 백금옥과의 관계에서의 역전을 꾀하지만, 백금옥은 그를 망가뜨려버리고. 윤 회장이 내가 졌다면서 자살하지만 관 속에서는 씩 웃고 있고. 그걸 본 백금옥은 내 인생 물어내라고 울고. 이게 인생 아닌가. 이 부부 곁에 영작과 <돈의 맛>의 모티브가 됐던 나미가 붙으면서 지금 구조가 만들어졌다.
-로버트와 에바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로버트는 한국 재벌들의 행태를 비상식적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구조 안에서 맘껏 놀아나는 모순적인 인물이며, 에바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이주노동자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돈의 맛>은 글로벌 희비극인 셈이다. =맞다. 로버트 같은 인물들이 더 심하게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한 일은 지금 이곳의 비상식보다 훨씬 더 했다. 다만 교묘하게 숨기면서 고상 떠는 거지. ‘Money is easy, fucking is great!’ 아시아에서 생활하는 서양인 중에 이런 생각 안 하는 이들이 있을까. 로버트를 통해 그런 상황을 잔인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서양 사람들이 로버트를 어떻게 볼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반면, 이민자들은 존재 자체로 모욕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한다. 절박하니까. 그러한 로버트와 에바 사이에 한국인이 있는 것이다. 이주민들이 타지에서 겪게 되는 처절한 이야기를 언젠가 찍어보고 싶다.
-이렇게 많은 배우들이 등장할 때 감독으로선 어떤 주문을 하게 되나. =윤여정 선생은 <하녀>에선 하녀였고 이번엔 부잣집 마나님이지만, 그저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랬다. 결과에도 만족하고. 효진씨와는 프리 프로덕션 때 자주 만나서 대본 읽고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그걸 다시 조연출 스탭들이 카메라로 찍고, 그걸 다시 보면서 부자연스러운 것들을 제거했는데, 나중에 효진씨가 어디선가 그랬더라. 자기로 하여금 나미를 연기하게 하지 않고, 자신 속에서 나미를 발견해주더라고. 내가 그렇게 한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게도 말이 되고. 그러면서 윤여정 선생의 좋은 연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배우들이 많이 연구해서 주어진 캐릭터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좋은 건지 아니면 선생처럼 캐릭터를 자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지. 강우씨는 어떻게 연기를 말릴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대사도 없으니까 그냥 막 미치는 거다. 가만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배우한테는 그게 굉장히 어려운 주문이다.
-<하녀> 때 전도연 역시 ‘등·퇴장만 시키고 자기가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한 적 있다. 백윤식의 경우는 어땠나.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네명의 주연배우 중에서 가장 센서티브한 이가 백윤식 선생이다. 요만큼이라도 마음이 불편하면 감정이 잘 안 나온다. 이렇게 까칠한 예술가는 아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사실 윤 회장을 맡기면서 <그때 그사람들>의 김 부장을 예상했는데 훨씬 힘을 빼고 연기하셨다. 황홀한 경험이었지.
-<하녀>의 은이는 금기의 선을 뛰어넘으면서 흥분을 느끼지만, <돈의 맛>의 영작은 허락된 쾌락 앞에서도 주춤거린다. 은이는 주인 집으로 돌아와 기어코 복수를 하는 반면, 영작은 주인의 집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 전부다. =<하녀>는 일종의 동화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우리 모두는 하녀다!”라고 했는데, 관객은 “난 하녀가 아닌데!” 하고 반응했고. 그래서 이번엔 좀더 이해하기 쉬운 주인공을 만들어야겠다 싶어 영작을 만들어넣었을 뿐이지 은이나 영작이나 똑같다. <하녀>의 은이가 “나 이 집 좋아해요!”라고 말할 때 그녀는 미친 게 아니다. 그녀는 순진하게 자기 행복을 좇는 여자다. <하녀>는 그런 여자를 처절하게 유린하는 상황을 그렸고. <돈의 맛>의 영작도 이를테면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서 미국 동부의 대학에서 MBA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 사는 인물이다. 중요한 건 영작이 감당하는 모욕이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친구들이 겪는 모욕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모욕감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백금옥의 집안 사람들은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 다 불행한데, 왜 이렇게 사는 것인가 질문해보고 싶었다.
-<돈의 맛>은 일부러 느슨한 구조를 택했고, 그 틈에 유머를 넣었다. =<그때 그사람들>과 비슷한 영화다. 아이러니에서 나오는 웃음. 우리 삶의 아이러니를 한 꺼풀 벗겨서 생얼로 보고 싶은 마음. 웃음 역시 누굴 비웃는 건 아니고. 예를 들면 백금옥은 너무 귀여운 여자다. 윤여정 선생과도 백금옥이 희대의 악녀지만 얼마나 귀엽게 그릴 것인가를 주로 고민했다.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랬을까. 그 여자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영작과 백금옥의 섹스는 정말 웃기다. =제일 먼저 떠오른 섹스 신이다. 그 장면을 떠올리고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어떻게 찍어야 할지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윤 회장과 에바의 섹스 신을 먼저 촬영하게 됐는데, 이 장면도 어떻게 찍을까 고민하다가 두 사람의 대사가 떠오르더라. 하우 올드 아 유, 아이 돈트 카운트 벗 올드 이스 굿 이너프, 뭐 이런 대사. 그래, 엽기명랑 코드로 가자, 싶었다. 굳이 리얼하게 찍을 필요가 없었다. 조감독들이 섹스 신이 다 가짜 같다고 그랬는데, 뭐 다 가짜 아닌가. 그렇게 보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영작과 백금옥의 섹스 역시) 상황은 엽기지만 분위기는 명랑하게 구성했다.
-엽기라는 단어를 들으니까 노 회장 역을 맡은 권병길이 떠오른다. 일본 만화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다. =늙으면 다 그렇게 된다. 권병길씨가 원피스 수영복 입고 수염 달고 나타났을 때 배우들이 연기를 못했다. 다들 웃느라고.
-윤 회장과 에바의 로맨스는 파국을 맞고, 반면 영작과 나미의 로맨스는 최소한의 희망을 품고 있다. =모욕의 체계를 보자면, 위부터 로버트-한국의 부자들-영작-에바의 순이다. 모욕의 체계 안에서 에바는 가장 큰 모욕을 당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살해당할 운명을 지녔다. 윤 회장은 죽었지만, (상위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이고. 영작과 나미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백금옥과 윤 회장의 관계를 답습하진 않겠지.
-영작과 나미가 죽은 에바의 관을 들고 필리핀에 가는 건, 죽어서 귀신이 된 은이(<하녀>)의 혼을 달래는 것처럼 보인다. =은이의 죽음을 봤던 나미로서는 그렇게라도 위로해야 한다는 걸 아는 거다. 그게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도리다.
-윤철(온주완)은 노동자들이 쇠파이프를 드는 건 중산층이 되지 못해서고, 그건 우리 책임이라고 말한다. 재벌들이 정말 그러한 책임을 갖고 있을까. =갈고리로 돈을 긁어서 제 배 채우려는 이들만 있으라는 법 있나. 중요한 건, 그 위치에 있다면 그 정도 생각은 하고 살아야 한다. 돈 많은 게 죄 아니다. 내가 섹스하고 싶어 내 돈 쓰겠다는 걸 비도덕적이라고 문제삼고 싶지 않다. 단, 이 사회의 리더이고 싶다면 (<하녀>의 은이처럼) 하루 15시간 일하는 이들이 평택에 있는 십 몇평짜리 아파트에는 살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거다. 근데 그런 놈이 있나. 있길 바라야지.
-영작은 계급장 떼고 윤철과 붙지만 흠씬 두들겨맞는다. =그게 리얼한 거다. 절대로 그 사람들, 못 이긴다.
-윤 회장이 에바와 떠나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하는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수평을 무너뜨려 찍었다. 식탁이 기울어지면서 기우뚱하는 배처럼 위태로운 느낌이 들더라. =김우형 촬영감독이 비뚜로 찍겠다고 해서 그러세요, 했는데, 아 그랬군. 위태롭다고 하니까 알겠네. (웃음)
-10대, 중산층, 군부, 재벌, 이제 남은 게 뭘까. =이주노동자, 아님 북조선의 핵은 어떤가? (웃음)
-5월23일 출국하는 걸로 알고 있다. 뜨거운 반응이 나올 것 같나. =상영작들을 거칠게 분류하면 유럽의 아트하우스 필름과 미국영화들이다. (집행위원장인) 티에리 프레모가 내 영화를 클래시컬하다고 자꾸 그러는데, 미국영화쪽에 가깝다는 말로 들린다. 클래식한 이야기 구조를 갖춘, 순수영화적 쾌감을 주는. 어쨌거나 예술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돈의 맛>을 안 좋아해도 상관없다. 잘난 척해도 다 위선이다. 내 입장에선 칸에 가는 중요한 이유는 돈이다. (웃음) <하녀>가 100만달러 정도 팔린 것 같은데 이번엔 50% 이상 더 팔리면 좋겠다.